바닷가 마을을 떠나며
네가 왔구나!
바다가 처음 내게 해준 말이었다. 어디서 왔냐고 묻지도 않고 나를 그대로 품어준 곳이었다.
'나는 여기서 나고 자랐지요!'
그렇게 말하고 싶던 곳이었고, 내 얘기를 다 듣고도 판단하거나 그 진위를 따져 섣불리 의심하지 않던 바다였다.
하루도 똑같은 바다는 없었다.
에메랄드 빛 물색과 빛나는 윤슬, 바다를 꼭 닮은 하늘색, 구름, 소리 없이 날아오르던 새들, 반겨주던 이웃집백구, 해풍에 누운 나무, 야생화와 잡초마저 아름다워서 돌아서자마자 그리울 것들에 안녕, 인사를 건넸다.
결국, 5년 반 만에 바닷가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병원이 가까운 곳에 살아야 될 이유와 아이들의 진학문제등을 고려했다. 제주까지 와서 시내에는 절대 안 살 거라고, 입찬소리를 하더니 결국 시내에 사는 것이 나에게 최선인 것을 인정하게 됐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는, 매일 달리기를 하며 몸에 좋은 먹거리를 챙기던 일이 죄다 억울했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잘하던 걷기며 달리기도 딱 끊고, 건강 생각해 먹지 않던 것도 맘대로 먹으며 스스로 반항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초라하고 절박한 시간의 강을 건널 때마다 '깨닫게 하는 삶'은 공평했고, 많은 것을 선명하게 했다. 덕분에 바닥을 드러낸 내 현실을 직시하고, 부족했던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더 멀리 가고, 더욱 다가오는 인연의 길도 명확히 갈렸으나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을 순하게 받아들였다.
그 일 이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하게 됐다. 좀 더 단출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자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이야기도 한다. 누구나 결국엔 죽는 것을 알면서도, 당황해 허둥 대는 일 없이 준비하겠다고 생각했다. 큰 딸에게 유언 아닌 유언을 틈날 때마다 남겨뒀다. 그럼 '굉장히' 이성적인 큰 딸은 <죽은 후를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스스로 물건 정리를 한다는 외국노인의 사례>까지 덧붙여 주며 내 유언을 응원해 줬다.
'사후 장기 기증 서약'은 10년 전에 이미 해뒀지만, 일을 계기로 대학병원에 사후 시신 기증을 하고 '학대 생존자'로 살아온 사람의 '뇌'에 대한 연구에 쓰여 '자료'가 되길 바란다는생각도 큰 딸에게 전해두었다. 그러면 '과학'을 신뢰하는 큰 딸은 명쾌하게 알겠다고 말해줬다. '엄마 제발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드라마 같은 건 없지만, 죽고 나면 꼭 그렇게 해줄 것같아 믿음이 갔다. 이제 유언대로 죽으려면 건강을 잘 돌봐야 할 일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필요한 이들에게 알뜰하게 나누고 가기 위해서 아픈 곳 없이 아껴서 잘 쓰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