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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n 30. 2023

 정중한 이별은 아프지만

바닷가 마을을 떠나며

네가 왔구나!

바다가 처음 내게 해준 말이었다. 어디서 왔냐고 묻지도 않고 나를 그대로 품어준 곳이었다.

'나는 여기서 나고 자랐지요!'

그렇게 말하고 싶던 곳이었고, 내 얘기를 다 듣고도 판단하거나 그 진위를 따져 섣불리 의심하지 않던 바다였다.

하루도 똑같은 바다는 없었다.


에메랄드 빛 물색과 빛나는 윤슬, 바다를 꼭 닮은 하늘색, 구름, 소리 없이 날아오르던 새들, 반겨주던 이웃집백구, 해풍에 누운 나무, 야생화와 잡초마저 아름다워서 돌아서자마자 그리울 것들에 안녕, 인사를 건넸다.


결국, 5년 반 만에 바닷가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병원이 가까운 곳에 살아야 될 이유와 아이들의 진학문제등을 고려했다. 제주까지 와서 시내에는 절대 안 살 거라고, 입찬소리를 하더니 결국 시내에 사는 것이 나에게 최선인 것을 인정하게 됐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는, 매일 달리기를 하며 몸에 좋은 먹거리를 챙기던 일이 죄다 억울했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잘하던 걷기며 달리기도 딱 끊고, 건강 생각해 먹지 않던 것도 맘대로 먹으며 스스로 반항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초라하고 절박한 시간의 강을 건널 때마다 '깨닫게 하는 삶'은 공평했고, 많은 것을 선명하게 했다. 덕분에 바닥을 드러낸 내 현실을 직시하고, 부족했던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더 멀리 가고, 더욱 다가오는 인연의 길도 명확히 갈렸으나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을 순하게 받아들였다.


그 일 이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하게 됐다. 좀 더 단출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자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이야기도 한다. 누구나 결국엔 죽는 것을 알면서도, 당황해 허둥 대는 일 없이 준비하겠다고 생각했다. 큰 딸에게 유언 아닌 유언을 틈날 때마다 남겨뒀다. 그럼 '굉장히' 이성적인 큰 딸은 <죽은 후를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스스로 물건 정리를 한다는 외국노인의 사례>까지 덧붙여 주며 내 유언을 응원해 줬다.


'사후 장기 기증 서약'은 10년 전에 이미 해뒀지만, 일을 계기로 대학병원에 사후 시신 기증을 하고 '학대 생존자'로 살아온 사람의 '뇌'에 대한 연구에 쓰여 '자료'가 되길 바란다는생각도 큰 딸에게 전해두었다. 그러면 '과학'을 신뢰하는 큰 딸은 명쾌하게 알겠다고 말해줬다. '엄마 제발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드라마 같은 건 없지만, 죽고 나면 꼭 그렇게 해줄 것같아 믿음이 갔다. 이제 유언대로 죽으려면 건강을 잘 돌봐야 할 일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필요한 이들에게 알뜰하게 나누고 가기 위해서 아픈 곳 없이 아껴서 잘 쓰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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