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성 zero
참치 캔의 기름을 끝까지 짜버린 것처럼, '공격성'을 완전히 제거한 '익명성'은 꽤나 담백한 일상을 선물했다. 기꺼이 ‘촌사람’이라 불리고 싶었지만, 다시 꾸린 짐을 결국 제주시내에 풀게 됐다.
'나, 이제 도시 사람! 도시 어멍이우다!'
바닷가 마을에 두고 온 이웃에게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같은제주도라도 바다가 보이는 곳과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의 체감은 확연히 달랐다. ‘바다가 그리울 땐 금방 보러 가면 돼! ‘위안 삼을 뿐이었다.
작은 마을에 살 때 간혹 육지'(서울)라도 가게 되면, 사뭇 다른 소음 강도에 놀라곤 했다. 서울 토박이였지만, 이 정도 소음에서 살았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일을 마치고 다시 마을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면, 이명이 들릴 만큼 마을은 조용했고, 금세 마음이 차분해졌었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제주 시내의 자동차 소음과 배달 오토바이 경적소리는 이미 조용한 곳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을 통해 합리화하는데능숙한 존재였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었고 온통 나쁘기만 한 일이란 없으니, 우리는 제주 시내의 긍정적인 면면을 빠르게 수용했다.
시내니 만큼 어딜 가든 교통이 편리한 것은 당연했고, 병원이 가까운 것도 좋았다. 작은 마을에선 상상할 수 없던, 어플로 주문만 하면 집까지 '배달'이 되는 신기하고 편리한 변화가 ’ 바다 잃은 슬픔' 마저 희석시켰다. (정말 신세계였다)
마지막 한 가지는, 바로 '익명성 보장'이었는데, 작은 마을에는 이름만 있으면 주소가 잘못된 우편물이나 택배도 문제없이 수신인을 찾아 도착했다. 작은 마을에서 애초에 '익명성'이란 가당치 않은 일이었고, 수시로 ‘민낯'을 요구하는 것에 피로감이 적지 않았단 것을 떠나 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익명성에 숨어 타인을 공격하는 행위가 사회적 범죄로 이어지자 마치 ‘익명성'은 '공격성'을 포함한 단어인 양 치부되기도 했지만, 공격성을 배제한 상태의 '익명성'은 오히려 복잡한 인간관계의 숨통을 틔고 , 심리적 은신처'를 만들어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관계 안의 소속감으로 내 가치를 판단하려 애쓸 때 많은 것이소비됐고, 그럴수록 개인의 성장도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내 민낯의 얇은 피부 속에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와 씩씩한 사람인 척 맺은 관계의 고단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 모든 문제는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한 것에 있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빠르게 인정하는 것과 하나를 얻었다면 하나를 놓아야 하는 간단한 이치를 깨달을 일이었다. 외로움'은 타인에 의해 느끼게 되지만, '고독'은 스스로원할 수 있는 것인 만큼 바다대신 얻게 된,
담백한 익명성에 숨어, 맘껏 고독해 볼 일이다.
<제주에 왕 살암시냐-‘도시 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