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세상은 커다란 달과 같다. 훤히 떠오른 달빛 뒤에 가려진 어둠은 자주 이분법으로 말했다.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거나 빛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며 자주 좌절을 부추겼다.
빛이 만든 이면의 어둠에는 몸과 마음이 더 성장해야 할 아이들이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했지만, 우린 이 사실을 자주 잊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상 속엔 형형색색의 음식이 꿀처럼 흘러넘쳤고 어디에도 결핍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먹방'에 열광하고 다이어트가 평생의 숙제라는 식의 과장법은 배곯는 이를 더 깊은 어둠에 가뒀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존재 유무나 빈부 격차와 상관없이 배고픈 시대를 살았다. 차이가 있다면 '없어서 못 먹었냐, 바빠서 못 먹었냐?' 정도로 이유만 다를 뿐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다. 따뜻하고 배부른 끼니는 스스로 존중받았다고 믿을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밥을 차려 줄 어른이 없거나 찾아먹을 음식이 없어 배를 주린 아이가 영상 속에 차고 넘치는 음식을 보며 어떤 꿈을 꿀지 생각하면 암담해졌다.
'남들 자는 만큼 자고
먹을 것 다 먹어 가면서 어찌 경쟁에서 이기겠어!'
아이들은 학교수업이 끝나도 밤늦도록 학원을 옮겨 다녔고, 원하는 학원 강의를 듣기 위해서 저녁 식사쯤은 포기하기도 했다. 제때 먹고 자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권리였지만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호받지 못한 아이의 허기가 과연 '성공'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가장 약자일 때 억압된 기억이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말이다.
성장에 맞는 경험을 유보한 채 공부만 하도록 강요받은 청년들에게 이제 사회적 성인이 됐으니 알아서 살라고 해도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넘어졌을 때 어떻게 털고 일어나면 될지, 제대로 알려준 적도 없지 않은가?
나 역시 아이가 중2가 됐을 무렵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열다섯 살은 친구와 경쟁하는 마음 없이 지내며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더 필요한 나이가 아닐까? 반문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을 바꾸지 않고는 눈에 띄는 변화를 갖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에 늘 부딪혔다.
관계 안의 소속감으로 내 가치를 판단하려 애쓸 때 많은 것이 소비됐고, 그럴수록 개인의 성장도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삶의 문제는 자신을 잘 아느냐 그렇지 못하냐에서 자주 나뉘었다. 스스로를 잘 알게 됐을 때 많은 것이 선명해졌고, 이 과정은 시험 문제 하나에 울고 웃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엄마, 학교는 시험을 위해서 있는 거야?"
아이가 질문을 던진 날부터 결국 먹이고 재우기 위해 자퇴를 결심하고 학교 밖 청소년으로 지내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제 시작일 뿐 수시로 흐렸다 개는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날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지만 제 속도를 유지하며 부단히 걷는 걸음은 마침내 가고자 한 길에 도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