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집
고작, 내 집 없다고 그리 서러웠을까. 짐이야 어디든 풀면 될 일이고 비바람 피할 수 있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마음에 맺혀 서러웠던 건 '언제든 돌아가도 좋을 집'에 대한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제각기 해결되지 못한 각자의 결핍을 채우느라 인생 대부분을 소비했다. 몸에 맞는 껍데기를 찾아 헤매는 소라게처럼 지난 내 삶은 힘들 때 언제고 돌아갈 집을 찾아 숱하게 짐을 싸고 푸느라 흘려보낸 날이 많았다. 돌아갈 곳이 없단 걸 인정할 수 없던 때는 비슷한 껍데기라도 찾겠다며 꽤나 시간을 들였다.
형편없이 허름한 집을 만나면 내가 잘 고쳐 가며 살 수 있다고 섣불리 장담했고 언제는 화려한 집의 겉모습만 보고 무작정 그런 곳에 살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찾은 껍데기마다 내겐 좁거나 너무 컸고 춥거나 더워서 숨이 막혔다. 때론 돌아갈 껍데기가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쓸데없이 힘을 빼곤 했었다.
캐나다에서 들어와 있던 큰 딸에게 안방을 내준 지 14개월 만에 방이 비었다. 지난주 딸의 짐 일부가 빠졌고, 집 정리를 한다고 며칠 몸도 마음도 분주했다. 일생 내 한 몸 담을 껍데기에 진심이다 보니 그동안 딸에게 방을 내주고도 공공연히 내 공간이 없다며 철없는 소리도 했었다. 이제 다시 나만의 공간을 되찾았다는 생각에 조금 신이 나기도 했고 이제 거침없이 글만 쓰면 되지 싶었다.
큰 딸은 지난 8월 말부터 예정대로 변호사 연수 과정이 시작됐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캐나다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초반 2개월간은 연수 일정이 온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캐나다 체류 비용 등을 감안해 11월까지 두 달간 제주에 더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캐나다 시간에 맞춰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집에 머물며 일정을 소화하기엔 여러 장애가 있었다. 딸은 연수 시작 직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얻어 거처를 옮겼다.
연수 첫 일주일 과정을 마치고 주말에 집에 온 딸은 들떠있었다. 청소년기에 집을 떠나 해외에서 20대를 홀로 꾸린 딸이 여기까지 오는 길은 절대 순탄치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나로선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두고 말하기가 늘 어려웠다. 장학금을 놓치면 학업을 이어갈 수 없던 현실적 험산을 부단히 넘어 이제야 평지를 걷게 된 딸을 보게 된 것 같았다.
나도 나였지만, 큰 딸 역시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캐리어 두 개와 배낭 하나만큼의 짐을 끌고 꽤나 여러 나라의 낯선 집을 전전했었다. 우리가 껍데기를 찾아 헤맨 이유는 조금 달랐지만,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린 마치 같은 부모에게 자란 이란성쌍둥이 자매처럼 마음을 공감하게 됐다.
딸은 어느새 '어른'이었다. 딸이 자신을 한결같이 단단하게 일으켜 세워 결국 원하던 자리에 데려다 놓은 모습을 보았다. 마치,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은 이런 거라고 전하는 딸에게서 나보다 더 큰 어른이 보였다. 우린 그날,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볍게 주고받았다.
딸이 다시 돌아가고 온기가 빠져나간 자리엔 긴 여운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아이들이 얼른 자라 혼자 있을 시간이 빨리 오면 좋겠단 말을 하곤 했다. 내 손 갈 일도 줄어들 테니 날아갈 듯 글도 써질 줄 알았다. 하지만 재잘대던 소리가 차례로 멈추고 아이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날 때마다 마음에선 이런 바람이 불겠구나! 며칠 마음이 가라앉더니 글쓰기도 소강상태다.
내 몸에 맞는 집을 찾아 끝없이 헤매던 날들이 내게 말했다. 내 아이들이 언제 든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껍데기가 돼 줄 일이 아직 남았다고 말이다.
이미 나는,
내 아이들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