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번 이우진이 쏘아 올린 53번
절판된 그림책 두 권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림책은 두권 모두 깨끗했지만 한 권에는 '2010년 1월 주현이모가'라고 쓰여 있고, 다른 한 권에는 'OO초교 1-4반 54번 이우진'이라고 프린트된 네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책을 선물한 주현이모와 1학년 4반 이우진이 어떤 모습일지 잠시 상상했다. 그러다 이우진의 그림책 초판인쇄 연도가 2013년이란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우진이 그림책을 갖게 된 시기는 무조건 2013년 이후여야 됐지만, 이우진이 54번이란 사실이 석연치 않다. 나는 이우진이 다녔다는 서울 OO 초등학교의 2013년 이후 학급 인원수 통계 자료를 찾아본다.
예상대로 2013년 이후는 과밀학급이 사라지고 학급인원 30명 내외로 운영된 게 맞았다. 그렇다면 이우진은 어째서 54번일까? 이우진이 54번이라면 뒤로 ㅈ.ㅊ.ㅍ ㅎ 등의 성씨를 가진 아이가 더 있을 테니 학급인원은 최소 60명 내외로 봐야 됐다. 이 네임 라벨은 믿을만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우진은 누구일까? 다른 경우의 수를 몇 가지 더 떠올릴수록 54번 이우진이 궁금해졌다. 이럴 때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하는 걸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54번이었다.
유독 고등학교 1학년 때 번호를 기억하는 것은 53번이던 아이 때문일 것이다. 가끔 53번이던 아이가 생각나곤 했지만 그때마다 난 내 기억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의심했다. 결국 내가 ‘그 애를 만난 적이 있긴 한 걸까?‘ 의문을 남길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4월이었다. 53번과 54번이던 그 애와 나는 수업 때마다 함께 할 기회가 많아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어디서나 친구들을 웃기려 애쓰던 나와 달리 그 애는 조용하고 무척 얌전했다. 그나마 그 애가 잘 웃었기 때문에 우린 그럭저럭 소통하며 지냈다.
어느 날 53번이 연락도 없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조회시간까지도 선생님은 별다른 연락을 못 받은 것 같았는데, 오후가 되자 선생님들 분위기가 이상했다. 53번은 다음날도 결석했고,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얘들아, 53번이 그저께 밤에 납치 됐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빌어주자!”
납치? 그랬다. 나는 이 단어를 종례시간에 이 같은 방식으로 처음 들었다.
한밤중 가정집에 침입한 강도가 가족을 칼로 위협하고 그 집 딸을 데리고 달아났다는 사건이 보도됐었다.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또 엉뚱한 상상을 이어갔다.
‘도둑질하러 갔지만, 가져갈 만한 변변한 물건이 없자 ‘에잇, 가져갈게 아무것도 없잖아! 안 되겠다. 그냥 갈 수 없으니 딸이라도 챙겨가자!’ 했다는 거야 뭐야?‘
그때 납치 됐다는 딸이 바로 53번 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내 기억은 이 지점부터 현실감을 잃고 혼란스럽다. 53번이 납치돼 사라진 뒤에도 우리 일상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마다 매점으로 달려가고 웃고 떠들다 혼났고 곧 있을 첫 중간고사 준비로 바빴다.
이런 연유로 나는 혼란스러웠다.
얼마 뒤, 53번이 다친 곳 없이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하지만 53번이 바로 등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53번의 부재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여고생을 납치해 나흘 만에 집 앞에서 풀어준 납치범이 검거되는 과정에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했습니다.
죽었다고? 이쯤에서 나는 다시 나의 허상을 의심했다. 어쩌면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에 모든 현실을 헛것으로 만들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53번은 여름방학이 끝난 2학기에 아무 일도 없던 듯 등교했다. 그 애는 변함없이 조용하고 얌전한 모습으로 다가와 내게 "안녕?" 하며 활짝 웃었다.
53번의 표정 어디에도 험한 일을 겪은 것 같은 모습은 없었지만 나는 더 이상 53번을 웃겨 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와 달리 정작 나는 언제 웃고 울어야 할지 어느 만큼의 고통에 아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어제 아침,
중고책에 붙어있던 네임라벨에서 내 상상은 다시 움찔댔다. ’ 54번 이우진'의 석연찮은 존재 유무는 '53번을 떠올리게 했다. 안개처럼 뿌옇기만 했던 53번 사건의 진위 여부는 물론 내 기억이 품은 진실의 범위를 이젠 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여전히 꿈인지 실제인지 불확실하다.
나는 몇 개의 기억나는 단서로 퍼즐을 맞췄다. 아! 53번이었던 친구야, 내가 널 웃길 궁리만 하고 있을 때 네가 연애 중이었다는 사실에 더 놀란 거 알아? 하지만 그럴 수 있지!
다만, 이 모든 일이 100일 기념 여행을 떠나기 위한 자작극에서 비롯된 걸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알게 된 건 다행인 것 같아. 그러지 않았다면 삶을 이만큼 조심히 살지 못했을 것 같거든.
내일이 더 나쁠지 몰라도
이제 미궁에 빠졌던 사건 전말은 비로소 선명해졌다. ‘안녕?' 말하고 활짝 웃던 53번 그 아이를 새삼 꺼내 기억해 보는 아침이다.
그나저나 책을 판매한 사람은 왜 네임 스티커를 제거하지 않고 책을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