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일에 대하여
영화 리뷰를 쓰려는 건 아니다. 다만 지난주 봤던 영화를 통해 잊고 있던 한 조각이 떠오른 것인데 그것은 지금껏 내가 기억하던 방식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왔다.
영화'서울의 봄'에서 1979년 12월 13일 새벽, 전두광은 쿠데타에 성공했고 그대로 날이 밝아 온 장면이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문을 모르던 시민들은 집 앞 도로까지 진을 친 장갑차를 보며 어리둥절했다. 이때 전두광은 승리에 취해 웃으며 말했다. 시민들도 이 상황을 보게 두라고!
내 기억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날은 1979년 12월 13일이었다. 아침에야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평소와 달랐다. 꺼칠해진 얼굴에 평소보다 더 커진 눈은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채 끔벅이느라 나를 보고도 야단조차 치지 않았다.
세상이 바뀐 그날 새벽, 경찰 신분이던 아버지는 비상 출동 상태로 어딘가에서 그 새벽을 보낸 것이다. 아침 밥상을 받고도 쉽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모습에서 간밤에 그가 얼마나 큰 두려움에 떨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국에 만 밥을 소리도 나지 않게 입에 물고는 몸을 낮춰 연신 라디오에 귀 기울였다. 그런 아버지 모습은 진심으로 두려움에 빠진 한 존재일 뿐, 평소 불호령을 내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철썩 같이 그 앞에 조아리던 내 우주에도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평소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은 엄격했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밥을 먹었고, 소매가 흘러내릴 것 같은 옷을 입었거든 식사 전 팔뚝까지 둘둘 말아 올릴 일이었다. 어른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식사도중 절대 말을 해선 안 됐지만 아버지는 식사 시간 내내 말할 수 있었다. 어른들 말씀 중 끼어들거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간 불호령이 떨어졌다.
소리를 내서 먹지 않아야 하고 자칫 음식을 흘리는 날에는 밥을 물고 눈물이 쏙 빠지게 울게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나를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지만 불호령 만으로도 몇 대를 쥐어 박힌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렵고 무서웠다. 아버지는 어린 내 눈에 덩치가 커도 너무 큰 사람이었다. 더구나 억양이 센 경상도 사투리와 일본말을 섞어 말하는 통에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왕방울 만한 눈과 매부리 코, 무엇보다 아버지가 범인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도 한 몫했다.
우리 집은 막다른 골목 끝집이었다.
늘 남의 집 셋방을 살다 처음으로 방이 아닌 집에 살게 됐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멀리서부터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사랑도 거짓말~'
그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아버지가 집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달팽이 보다 느리게 걸어서 골목 끝에 도착했다.
겨우 대문을 밀고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마당을 향해 낚싯대 여러대를 드리워 놓고는 마른걸레로 정성스레 그것들을 닦고 있었다. 나는 얼굴만 겨우 알고 지내는 이웃집 아저씨를 대하듯 90도로 공손히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건 꿈같은 얘기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끝없는 심부름 쇼가 펼쳐졌다. 아버지는 마치 모든 일을 미루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끝없는 심부름거리를 찾아냈다. 더구나 아버지는 수많은 심부름을 한 내가 오히려 쩔쩔매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나는 체념하고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다음 심부름을 기다릴 뿐이었다.
"선인자도 부모요, 악인자도 부모인기라!"
산처럼 큰 아버지는 바짝 마른 어린 남매를 무릎 꿇려 앉혀두고 일장 연설하길 좋아했다. 착한 사람은 물론 혹여 나쁜 짓을 저질렀더라도 부모는 부모라는 취지의 내용은 항상 똑같은 것이었다. 어릴 땐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르고 머리를 조아렸고, 좀 더 자란 뒤론 '내 부모는 선인일까 악인일까?'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었다.
'선인 같기도 악인 같기도 한 아버지! 당신의 오랜 가르침은 혹여 후일을 대비한 큰 그림이었나요? 어린 나를 리모컨 보다 빠르게 조종하며 태평하게 낚싯대를 손질하던 나의 아버지!
구멍 난 자루를 끌며
그날 새벽 세상이 바뀐 줄 몰랐던 나는 영화를 보다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날, 겁에 질려 울 것 같던 아버지가 현실에서 큰 산처럼 군림해 볼 곳은 결국 말귀를 겨우 알아듣는 어린 남매 정도였을지 모르겠다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내가 기대했거나 믿고 있던 것보다 훨씬 유약한 것일지 모른다. 내가 전 생애를 거쳐 증명해 보이려던 일 또한 사실은 증명조차 할 것 없는, 그때 그 먼 시간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란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