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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an 11. 2024

오늘은, 여행

우리 집이라니!

큰 파도는 없었지만 바다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개구쟁이처럼 출렁였다. 비행기는 번번이 바다에서 튀어 오른 것처럼 순식간에 나타나 2층 카페 지붕에 닿을 듯 날아왔다.

공항과 가까운 이곳은 이륙한 비행기가 낮게 나는 위치였기 때문에 날아오는 비행기를 배경으로 사진 찍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카페 2층에서 바라보이는 해안도로에는 몇 쌍이나 되는 연인들이 카메라 삼각대를 세워놓고 대기 중이었다. 그러다 비행기가 날아오면 카메라를 등진 채 비행기를 향해 한없이 손을 흔들었다.


비행기가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가면 그들은 다정히 흔들던 손을 가차 없이 거두고 카메라로 달려갔다. 하지만 원하는 사진이 찍히지 않았는지 그들은 그 뒤에도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들이 남기고 싶은 그 찰나는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일까? 아니면 수없이 인증하려 분투하던 그 반복된 동작일까? 내가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는 사이에도 그 동작은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종교 행사처럼 이어졌다.


한 쌍의 연인이 겨우 떠나면 곧바로 다른 연인이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했고, 그 광경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내내 이어졌다.


가끔 비행기가 지날 때 자신의 아이를 높이 들어 올리거나 반려견을 들어 올리는 정도만 다를 뿐 모두 인증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카페에 앉아 그 모습만 바라봐도 하루가 지루하지 않겠다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몇 번은 웃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됐고 사춘기 1, 2가 종일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삼시 세끼를 기다리는 날이 시작됐다. 지난주 방학과 동시에 장을 봐 재료를 손질하고 소분해 냉동실에 넣거나 폭풍 반찬을 만들어 놓고 나는 선포했었다. ‘최선을 다해 끼니를 챙겨 주겠지만 하루 한 끼나 간식정도는 알아서들 찾아먹기로 하자!'

안 그래도 쥐어짜던 글쓰기 시간 확보에 비상이라면 비상이었다.


오늘은, 여행하는 걸로!

아침 일찍 일어나 사춘기들 아침을 챙기고, 개와 고양이의 아침 민원을 해결해 준 뒤 배낭을 메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집을 벗어난 나는 별 고민 없이 큰 딸이 캐나다로 가기 전에 지내던 동네를 향했다.


차로 가면 20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1시간 20분을 걸어 딸과 함께 바라보던 바다 앞에 도착했다.

글쓰기에 집중하는 상태라면 당연할 근원적인 고민였지만, 큰 딸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내 생각을 확장시킬만한 얘기를 해줬을 터였다. 철학, 인문, 고전과 자신이 듣고 있는 팟캐스트등 여러 가지 사례를 총동원해 줬을 것이고, 무엇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내 밑천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시차가 다른 때문에 우린 각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는 문자를 남겨두고 서로 가능한 시간에 답을 하기로 했었다.


딸에게 메시지를 보내둘까? 생각도 했지만, 딸도 새 로펌에 출근한 지 며칠 되지 않는 시기였다. 다른 신경을 쓰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걷다가 스스로 답을 얻길 바랄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며 오늘은 오롯이 여행하는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추울 거라는 예보와 달리 바람도 없는 바다와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타고난 길치인 나는 한두 번 길을 잘못 들었고 , 하필 그때마다 반대 방향으로 걸은 바람에 자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차피 정해진 길도 없었다. 어쩌면 아직 내겐 길이 끊기고 헤매다 스스로 더 많은 새 길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몰랐다.


걸은 수가 만 오천보를 넘기자 발이 아파 어디라도 앉아 신발을 벗고 싶었다.


그때,

나는 낯선 골목에서 마주친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그 집 문패를 본 순간이었다. ‘우리 집을 여기서 만나다니!' 마음은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고 어쩐지 나는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찾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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