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 Feb 09. 2024

건너뛰거나 혹은 가위로 오리기

<고통스러운 경험을 피하고 쓴다면>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리베카 솔릿-멀고도 가까운

책 속을 가로지르고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고립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통찰은 흔히 경험에서 얻어졌지만, 그 깨달음을 말하기 위해 과연 이야기를 어디까지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자주 멈칫거렸다.

<산문적인 인간 1>을 연재하고 있을 때였다. 한 가지 기억을 꺼내 글을 쓰는 일은 즐거웠지만, 그 기억을 따라 줄기식물의 그것처럼 딸려 올라오는 또 다른 기억 때문에 나는 자주 당황했었다.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 근데 그 이야기까지 쓴다고? 어쨌든 그게 팩트니까! 정말? 난 아직 거기까진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걸? 나를 휘저은 기억을 글로 적지 못한 날에는 몸이 아프기까지 했었다.


나는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잊고 있던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연이어 꺼내놓는 것에 질겁해 서둘러 연재를 끝냈었다. 그 뒤 내적 갈등의 시간을 거쳐 다시 <산문적인 인간 2> 연재를 시작한 것이었는데 여전히 내게 그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았다.


지난주 연재했던 '그릇이 거기 있는 이유'를 쓰게 된 동기는 인정욕구 때문에 손님을 초대해 파티를 열던 내 모습이 과거 어느 지점의 무의식에서 왔음을 깨닫게 된 대서 시작됐다. 하지만 글이 후반으로 갈수록 나는 겪은 일을 더욱 솔직하게 쓸 수 없었다.


나는 '남겨진 그릇'이라는 매개에 담긴 내 인정욕구의 뿌리를 찾아 솔직히 써야 했지만, 결국 떠올리기 고통스러운 부분을 피해 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른바 기억을 건너뛰거나 가위로 오려내는 방식으로 다시 급하게 글을 마무리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글은 애초에 하려던 말을 담지 못했고, 마치 실행에 옮기지 못한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서사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앞선 글에서, 내가 주저하던 대목은 바로 '현재의 나는 과거에서 온 게 틀림없었다.'부터였다. '내가 가진 물건에는 그것이 내게 올 때의 마음이 담겼고, 과거의 나를 기억할 단서가 될 수 있었다.'까지 쓴 뒤부터 나는 과거의 어떤 단서란 말인지 써야 했지만, 그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버렸다.


두 군데에 가정을 꾸려둔 그(아버지)는 필요에 따라 양쪽 집으로 사촌들이나 자신의 친구나 지인 초대하길 즐겼다. 물론 초대받은 이들도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게 방문했기 때문에 남자의 권위를 내세운 그의 뻔뻔스러움이나 불안정하고 모순된 상황을 의심해 볼 여지가 없었다.


그녀(엄마)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그녀는 그가 초대한 지인이나 친척들의 상차림을 완벽하게 준비하려 했다. 신발을 신고 들어오기 미안할 만큼 깨끗한 마당,  잔치상을 방불케 할 요리들, 아무리 바빠도 잊지 않았던 나에 대한 입단속이 그랬다.(손님들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손님들이 돌아 간 다음에 아주 혼날 줄 알아! 같은)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그녀에게는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었다. 그들에게 그토록 잘 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녀의 행위에는 그 불안정한 땅에 자신의 존재감을 남기고 영역을 확보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는 자신의 혼인 사실을 숨기고 그녀와 결혼식까지 올렸다. 내 위 오빠와 나를 낳고야  현실을 안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양면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었다.


고아원 앞에 버려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던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던 어린 날을 아프게 기억하면서도, 나는 결국 그녀의 방식대로 끝없이 요리를 만들고 사람을 그리워하며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이미 여러 방식으로 내 안에 각인됐고, 내가 그녀를 원망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녀와 내가 애초부터 강력히 얽혀있던 사실을 피할 수는 없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완벽히 타인 몫이었음에도 그녀는 물론 나 역시 마치 그것을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착각했었다. 삶의 어긋난 길은 완전히 회복할 수 없더라도, 솔직히 적지 못한 글의 뒷이야기를 바로 잡는 일은 얼마든 할 수 있는 일이라 참 다행이다.


 


이전 03화 그릇이 거기 있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