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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Feb 16. 2024

프라이팬 길들이기

<그다음 이야기를 쓰자!>

코팅팬에 길이 덜 들었던지 달걀 프라이가 팬 여기저기에 들러붙었다. 그 상황만 봐선 프라이 팬을 그냥 버리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나는 더운물을 팬에 담고 실리콘 스푼을 이용해 들러붙은 달걀 잔해를 달래듯 살살 떼내기 시작했다.


이 같은 내 행동은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이의 잔등을 살살 긁듯 프라이팬을 달래며 주방에 잡혀 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겨울 방학은 너무 길었고, 고양이는 갈수록 요구 사항이 늘었다. 교실에 오는 아이들도 방학 중 수업 변동이 잦았고,  보강까지 하다 보니 일주일 동안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이제 삼시세끼 밥을 차리는 일은 별생각 없이, 밥때가 되면 자판기처럼 뚝딱 내놓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일상의 여유 없음은 곧바로 글 쓸 시간이 절대 부족함을 의미했다.

심지어 정신없이 바쁜 바람에 사춘기 딸의 검정고시 원서 마감이 오늘인 것도 어제야 알았고, 부랴부랴 필요한 서류를 떼어 오늘 겨우 접수를 마쳤다. 다시 생각해도 프라이팬은 그냥 버리는 게 나았던 게 아닐까?


이번주 금요일 <산문적인 인간 2> 연재를 위해 며칠 전 써놓은 초고가 있었다. 거기에 이야기를 보태 원고를 마감할 요량이었다.

내 안에서 일렁이던 이야기가 몰려오는 파도에 몸을 던지는 걸 지켜본다. 매주 이런 식이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야기가 거센 파도에 뛰어들지 나는 알 수 없다. 기억하는 고통의 깊이만큼 실컷 자맥질하다 결국, 변곡점을 맞길 기대할 뿐이다. 오늘도 내 이야기는 가장 높은 바위로 기어올라가 그곳에 우뚝 서더니 큰 파도가 밀려오길 기다렸다 다시 몸을 던졌다.

부끄럽지만 그날 새벽의 나는 그랬던 모양이다.

결연함이 독립투사와 닮았고, 다시 글을 읽을 땐 마치 실제 바위를 기어오른 것처럼 가슴과 무릎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오늘 새벽의 나는 절대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는 거였다.


겨우 이틀 만에 감정이 이런다고? 오늘의 나는 고통의 바다를 자맥질할 수가 없다. 당장 처리 할 일에 발이 걸려 고꾸라 질 판인데, 왜 자꾸 파도에 몸을 던지냐며 딴전을 부렸다.


프라이팬을 간지럽히듯 닦던 나는 이 과정이 글쓰기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팬을 길들이기 위해선 뜨거운 팬을 절대 찬물에 담가선 안 됐다. 팬이 식을 때를 기다렸다 조심히 닦고 팬 전체에 기름을 입혀 종이로 닦아 주고 예열해 다시 기름을 입혀 다시 예열하길 반복했다. 그래야만 코팅팬이 유막을 형성해 표면의 강도가 높아질 수 있었다.


글쓰기도 그랬다

요즘 글 쓰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글쓰기 관련 참고 서적도 많이 출간되는 모양이다. 글쓰기엔 부단히 읽고 쓰는 방법 외에 별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에 대게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뻔한 이야기 중에서도 글을 쓰고자 마음먹은 뒤, 제일 처음 쓰고 싶던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오직 그 이야기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이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만큼, 글 쓰는 이에게 첫 이야기란 그야말로 동력이고 불쏘시개가 분명했다.


나에겐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그랬다. 그 이야기가 펜을 들게 했음은 물론이었고, 그걸 쓰지 않고는 절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가 없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쉽게 쓸 수 없고 나를 소진해서 쓰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안 쓸 수 있다면 안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두서없고 들러붙은 달걀 프라이 같으면서, 각자에겐 심장 같은 이야기였다.


안타깝게도 대게, 그 이야기는 길들여지지 않은 코팅 팬 위에 써졌다. 그러다 보니 결국 들러붙은 계란 프라이가 될 수밖에 없지만 쓸데없는 것이 아님은 물론, 오히려 그런 쓸모를 가졌다.


안 쓰고는 버틸 수 없는 마음 때문에 부단히 쓰는 사이 우린 팬 전체에 기름을 바르고 팬을 달굴 기회를 얻는다. 나는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심장 같은 이야기로 팬에 기름칠을 하고 그곳에 고인 통찰을 모아 우린 결국 그다음 이야기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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