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나를 기억하며 쓰기>
주말 내내 제주엔 강풍이 불고 종일 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런 날씨가 이어지면 섬에 산다는 사실이 좀 더 명확해진다. 선명한 건 언제나 좋았다. 불안은 항상 막연하고 흐릿한 것으로부터 왔으니까. 고립은 섬이 가진 큰 매력이었다.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명확한 이유 때문에 날씨가 엉망일수록 나는 더이상 외롭지 않았다.
단단히 체했던 거지. 그 애가 쏟은 토사물은 자기 그림자보다 넓게 퍼졌으니까. 교실은 일순간 아! 하는 탄식이 터진 뒤 조용해졌다. 담임 선생님도 얼음처럼 굳어 잠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고, 교실엔 6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다고 믿을 수 없을만큼 적막이 흘렀다. 선생님은 그 순간 처음으로 교사가 된 걸 후회했을까? 내가 아홉 살이던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남자 애는 짝이었는데, 그애는 사전에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이 수업 중 갑자기 분수처럼 몇 번이나 토했다. 그날 유난히 노랗고 핏기라곤 없이 창백한 안색만은 기억나지만, 그것뿐, 그 아이의 이름은 물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얼마나 정막 속에 있었던 걸까? 그때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막을 깬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교실 뒤 비품 보관함에서 쓰레받기와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가져와 토사물을 치웠다. 치워야 되나? 아닌가? 생각하기 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던게 분명했다. 그때, 나는 마치 태어나 아홉 살이 되도록 매일 토사물을 치워야 해서 이미 이골이 난 아이처럼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왜 이걸 해야 하지? 같은 생각이 아예 없을 뿐 아니라, 당연히 내가 하지 않음 누가 할까?' 상상했다는 게 더욱 정확했다. 나는 친구의 그림자보다 넓게 퍼져있던 그것을 쓰레기통에 야무지게 쓸어 담고 억척스레 대걸레질까지 마친 뒤 자리에 와 앉았다. 평생 해본 게 아니라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침착함과 대범한 모습이었다.
내 도파민은 이럴 때 폭발적으로 분출된 게 분명했다. 남이 하지 않는 일을 자청하고 누구도 못 할 일을 나서서 해결하는 사람이 되는 그 순간 말이다. 이 마음은 오락적 쾌락에 빠진 인간 상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 뒤로도 나의 쾌락이라 할 솔선수범 중독 증상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오랫동안 내 몸은 하지 않아도 됐을 온갖 경험과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차라리 ‘난 어차피 무얼 해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쿨하게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굉장히 음울하고 반항적인 아이가 되지 않았을까?
‘뭘 잘못 먹고 와서 예고도 없이 토는 하고 난리냐?‘ 내가 대걸레질 하듯 노랗고 창백한 아이 멱살을 억척스레 쥐고 흔드는 상상을 하다 관뒀다.
다행히 난 좀처럼 쿨하지 못했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방식을 따라 내 마음이 편한 삶을 살려 애썼다. 이 불안정한 관계는 이 빠진 톱니바퀴처럼 덜거덕 거리며 꽤 장거리를 굴러갔다. 친구들이 흘린 쓰레기를 주워 조용히 쓰레기통에 넣는 아이를 자처하고,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이나 어렵게 얻은 것을 계산 없이 타인에게 줘버렸다. 이런 과감한 행보는 오히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닌가? 오해를 살 만큼 백치미로 가득한 것이었다.
난 거기엔 계산 따위가 있을 수 없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나는 인정 받기 위해서라면 고생을 자처하며 나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자주 이 그릇을 모두 꺼내 닦고 180미터 접이식 테이블 두 개를 펼쳐 T자로 배치했었다. 곁에는 120미터 보조 테이블까지 두고 미니 뷔페 상차림 준비를 즐겼다. 대형 파티용 그릇마다 음식이 넉넉히 담기려면 족히 2-3일 하루 전날부터 장을 보고 재료 손질을 해야 한다. 나는 음식의 코스를 짜고, 최소 여섯 가지에서 여덟 가지, 많게는 열 가지가 넘는 메뉴의 레시피를 기억하고, 손질한 재료를 나눠뒀다. 차례로 양념해 조리고 볶는 과정을 거쳤다. 손님이 도착하기 전에 준비가 끝나도록 촘촘히 시간 계산 해두는 걸 잊지 않지만, 음식이 가장 맛있는 순간을 놓칠까 봐 늘 노심초사했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연신 감탄하며 파티를 즐겼다. 그럼 나는 신이났었나? 돌아보니 그렇지 못했다.
나는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식은 음식을 다시 데우고, 비워진 음식 접시를 채웠다. 디저트를 내오고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엔 손님마다 잘 먹던 음식을 눈여겨봤다. 따로 포장해 들려 보냈다. 손님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설거지할 모두 끝마치면 손목이 시큰거리고 물리적인 피로가 밀려왔지만, 나는 피곤한 줄도 몰랐다. 피로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니! 이유는 있었다. 손님들이 내 음식을 먹는 내내 들려준 칭찬, 찬사, 감탄 때문이었는데 그것엔 중독성이 있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중독된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장을 보고 요리할 수 있었고, 무거운 파티용 그릇을 꺼내 닦고 설거지하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그 결과 8년 전 도시를 떠나 제주도에 정착할 즈음, 나는 제 풀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스스로도 사람을 만나면 한없이 약해지는 나를 견디기가 힘들어서 도파민 과다 분출로 솔선수범 할 일 없는 곳에 제발 고립되라고 기도할 지경이었다. 가만히 있어선 사랑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조바심은 친구의 그림자보다 크게 퍼진 토사물도 두렵지 않았고 더럽지도 않았다.
내게 사랑이란 그토록 갈급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 받는 아이와 나는 처지가 달랐고, 난 본능적으로 그걸 알고 있었다. 아홉 살 그날, 친구의 토사물을 치우던 그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며 위로했다. 현재의 나는 과거에서 온 게 틀림 없었다. 왜 그리 바보같이 살았냐고 탓하고 싶진 않다. 그때 나는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거라고 그때의 나를 다독여주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