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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17. 2024

바스러지거나, 기진맥진한!

마음에 대하여

알면서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뵈지도 않는 마음이 돕지 않고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대를 이어 중시되던 체면과 겉치레는 차라리 우리 숙명이라 여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결국, 남의 눈치를 본다는 의미인 체면 차리기에 실속이 있을 리 없었다. 이토록 뼈에 새겨 대물림된 낮은 자존감은 안타깝게도 후대에까지 여러모로 영향을 미쳤다. 타인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견디기 어렵지만,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눈앞에 놓인 현실로부터 그들을 멀리 달아나게 만들었다.


활짝 열어 보일 수 없는 마음에 그늘이 담기듯, 굳게 닫힌 문 안쪽엔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 쌓였다.

겉보기에 그들은 멀쩡히 직장에 다니며 경제활동을 했다. 대인관계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야말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뒤엔 손하나 까딱할 수 없이 방전된 탓에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그저 돌볼 수 없는 것을 넘어 자해에 가까운 상태에 자신을 뒀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따라오지 않는 마음을 움직일 방도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며칠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일명 '쓰레기 집'이라 불리는 저장 강박증에 관한 주제를 다뤘다. 지금껏 알려졌던 저장 강박증은 고령층에서 자주 발견됐다. 그들은  버려진 물건을 주워왔고, 사용하지도 않지만 버리지도 못한 물건을 쌓을 수 있을 때까지 쌓은 뒤 과도한 애착증세를 보였다.


이번 프로그램의 주제 역시, 버리지 못한단 의미에서 저장 강박증과 닮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문제는 상당히 다른 형태의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대상은 1인가구인 20-30대 청년층, 그중에서도 90%가 여성이라고 했다. 버리지 못한다는 점에선 저장강박증상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그들이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이 버리지 못한 물건이 아닌, 쓰레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천장까지 쌓인 것은 모두, 그들이 내다 버리지 못한 생활 쓰레기였다. 공간을 쓰레기에 내준 이들은 쓰레기 더미 옆에 겨우 몸을 누일 공간만 확보한 채 생활했다. 이들은 스스로 사회와 격리된 ‘은둔형 외톨이'와 달리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며 경제 활동도 했다.


요즘, 이런 가구의 청소의뢰를 자주 받는다는 청소업체 관계자는 이들 중에는 전문직 종사자도 다수 있었기 때문에 직업군 만으로 어떤 통계를 낼 만한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이들은 아침이면 일터로 출근했고, 퇴근한 뒤엔 악취와 바퀴벌레, 반려동물의 배설물이 뒤엉킨 공간 한쪽에서 배달 음식을 먹고, 스마트 폰을 보다 잠드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가족을 포함해 주변 누구도 이 같은 상황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들 역시 문제의식을 못 느낀 건 아니었다. 다만, 쓰레기를 모아 밖으로 내다 버릴 정신적 동력이 없을 뿐이었다. 마음의 힘은 이렇듯 중요해서, 마음이 분연히 일어나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우린 쓰레기 봉지하나 들어낼 수 없을 만큼 무력한 존재였다.


나는 그 뒤 인터뷰에 주목하게 됐다. 그녀도 처음엔 쓰레기를 치워 보려 했지만, 쓰레기 봉지를 든 채 이웃을 만나는 게 불편했단 내용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단순한 행위조차 타인을 의식하고,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는 사이 버리지 못한 쓰레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는 그녀 말엔 요즘 세대가 겪는 어려움의 단서가 있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자신의 공간에서 배달음식을 먹는 그녀의 시선은 스마트폰을 통한 가상 세계에 있었다. 잠깐, 익숙한 예능의 시그널 뮤직도 들렸다. 그녀는 온통 밝고 화려해서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곳으로부터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방송 이후 온라인에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적 목소리가 많았다. 원룸 임대인 커뮤니티엔 탄식과 함께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각자 입장이 다른 만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비난만으론 이 문제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만큼 멀어진 현실에서 맴도는 그들 모습에는 분명 삶이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쓰레기로 가득 찬 공간은 마음 잃은 이의 무력함을 여실히 보여줬다. 망가진 마음은 자해하듯 자신 공간을 훼손했지만, 여전히 타인의 이목이 문제였다. 결국, 청소업체를 통해 사람의 왕래가 적은 새벽 시간 청소를 의뢰하고, 비밀유지 조항을 넣은 계약서를 쓴 뒤에야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나는 청년들 모습에서 지금 자라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제 나이에 배울 것을 배우고 있을까? 혹시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이 사회적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과연 부모는 아이가 알아야 될 것을 가르치고, 경험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을까?


결국, 모든 부모의 바람은 자녀의 건강한 독립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기 위해선 타인의 시선에 맞추느라 기진맥진 해선 안된다. 바스러질, 껍데기 같은 마음으론 어림없었다.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 시선은 멈췄다. 우리 시선이 멈춘 가장 앞자리에 자신을 두기로 하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돌볼 마음의 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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