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 May 20. 2024

테이블이나 의자가 되는 꿈

듣는 사람

단단한 테이블과 편안한 의자가 있는 곳. 나는 오래전부터 자주 그곳에 머무는 상상을 했었다. 무의식에서도 동경한 마음엔 그곳이 내게 줄 안온함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여전히 나는 그곳을 자주 떠올린다. 다만, 달라진 점이라면 이젠 내가 단단한 테이블이나 더없이 편안한 의자, 그 자체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들이 등교하는 아침 7시 30분. 나는 그때까지 최대한 집안일을 끝낸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민원을 해결하고, 청소나 설거지, 이불을 털어 해가 들 자리에 내놓으며 아들의 아침을 챙긴다. 홈스쿨링하는 막내가 일어나면 먹을 주먹밥과 과일도 따로 준비해 둔다.


사실, 이렇게 서두르는 데는 아들 등교와 동시에 내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이 시간엔 캐나다에 있는 큰 딸과 자주 통화했다. 딸은 이 시간이 일과를 마친 시간이었다. 글쓰기에 한참 몰두해 있다가 딸의 전화가 오면 나는 미련 없이 노트북 모니터를 덮는다. 내가 테이블이나 의자로 돌아가거나, 그 자체가 될 시간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터울이 많은 세 아이가 있다 보니, 내가 상대할 대화 주제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다. 딸에게 캐나다 어느 법정에 관한 얘기나, 딸이 맡은 사건에 대해 들은 날, 아들이 시작한 주말 아르바이트에서 있던 일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그뿐 아니라 홈스쿨링 하는 사춘기와는 매 끼니를 함께 하며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부터 영화, 그림, 책, 뉴스 기사까지 온갖 장르가 식탁 위에 오르는 그런 식이었다.


딸의 이야기를 듣는다. 딸이 낯선 나라에서 초임 변호사로 겪는 기쁘고, 버거운 모든 이야기를 듣는다. 엄마, 딸의 첫마디만 들어도 나는 딸의 감정 맨 밑바닥에 흐르는 미세한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반사적으로 내 것과 닿아 스파크를 일으켰다. 엄연히 타인임에도 딸의 감정이 이토록 내 것처럼 전해지는 현상을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엄마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채, 나는 딸이 할 말을 꺼내길 기다릴 뿐이다. 사실, 어떤 말을 내놓든 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모든 일에는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결정도 결국 딸이 내릴 것이었다. 그럼에도 딸이 나를 찾는 이유는 내게 말하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선언하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흔들리거나 삐걱대지 않는 단단한 테이블이 되고, 더없이 편안한 의자 역할에 집중할 뿐이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치료를 시작하고 놓친 구멍을 발견하던 중, 아들은 늘 메시지를 전해왔다는 걸 알게됐다. 나는 줄곧 그런 아들에게 집중했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성장하려는 아이 마음까지 이해했는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기질이 예민해 잠을 설치거나 낯을 가리는 데다 고집이 센 아들이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맞벌이였던 나는 항상 마음이 바쁜 나머지 아이가 경험할 일을 대신 해치웠었다. 결국, 망치고 다시 세워 성장할 아들의 기회를 내가 제한한 꼴이었다


아들은 집 근처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치료를 시작한 뒤 아들이 원하는 데로 따른 결정이었다. 아들이 첫 아르바이트를 갔던 날, 나는 아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 안에 무수히 많은 해답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들이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처음 경험하는 사회생활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하면 어쩌나. 더구나 어른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인데 괜찮을까? 나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염려할 뿐 아니라, 아들이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믿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당연히 실수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이 아들을 성장시킨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들은 이런 내 불안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가장 어려워했던 환경에 스스로 들어가 부딪힘으로 막연했던 불안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의 성장을 원하고 있었는지 증명이라도 하듯, 새로운 관계 안에서 자신의 확실한 자리를 만들었다. 맡은 일을 잘 끝낸 아들의 하루하루가 성실히 쌓이는 동안 아들은 몰라보게 밝아지고 있다.


대학 진학 상담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진로와 관련된 당연한 고민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결국, 지금 당장 아들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타인의 이목이나 주위 상황에 떠밀리듯 진로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아들이 몸을 기댄 테이블이 안전하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는 듣는 게 무척 어려운 때가 있었다. 듣기보단 오히려 더 많이 말했다. 그땐 마치 뭐든 전달할 사명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내 문제를 해소하지 못해 듣지 못한 것뿐이었다. 흔히, 성숙하지 못한 양육자에 머물며 저지르는 미숙한 행동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좋은 경험을 갖지 못한 양육자라는 자격지심은 내 모든 불안의 시작이었고, 그 끝엔 언제나 간절한 기도가 담겼었다.


간절한 바람은 어떻게든 길을 내기 마련이었다. 희망을 발견한 것은 아이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좋은 양육자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음을 깨달은 뒤였다. 아이가 나날이 자라는 것처럼 양육자도 한 번에 좋고, 나쁨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 말은 아직 늦지 않았고, 자신의 간절함 만큼 얼마든지 성장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


삶의 과정은 어느 하루 벌인 이벤트로 달라질 수 없었다. 한결같이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이 모이고도 가까스로 변화하는 게 삶이었다. 그렇다면 양육자가 자식에 갖는 기대는 너무 성급한 것이었다. 겨우겨우 이어 붙이는 걸로는 스스로 자존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인데 말이다.


단단한 테이블과 편안한 의자가 된 꿈을 꾸었다. 좋은 양육자는 주어진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에 새겨진 부정적 경험을 떨쳐내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성장을 도모한 결과 양육자로써 나도 성장했음을 느낀다. 아니, 부모가 자식을 키운다는 말은 틀렸다. 우리는 서로 를 키우는 존재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언제든 힘들 때 내게 오라고 말했다. 단단한 테이블과 편안한 의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