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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23. 2024

가장 보드랍고 단단한

알맹이에 대하여!

가끔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의 플롯보다 작위적이다. 만약 영화나 소설에서 그 같은 장면을 봤다면, 노골적인 우연 설정이 식상하다며 별 하나는 뺀 리뷰를 남기지 않았을까


큰 딸은 4개월의 연수기간 동안 토론토의 한 로펌에서 일했다. 연수생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조건 때문에 딸의 기대도 컸다. 하지만 연수생의 평가 권한을 가진 담당 변호사의 영향력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엔 위계가 명확했으므로 막연하지만, 담당 변호사가 보편적인 인품과 도덕적 양심을 가졌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딸은 롤모델이 될만한 사수를 만나지는 못했다.


연수기간 겪는 불합리한 상황에 비해 딸은 늘 담담했으므로 나는 목소리의 미세한 파장을 통해 짐작해 볼 뿐이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상황이 안 좋을수록 우린 우리 식 농담을 하며 더 많이 웃었다는 것이다. 긴 통화 말미엔 '오늘보다 내일 더 나쁠 수 있어. 각오하자고!' '꽃길은 비포장 도로인 거 알지?'  냉소 섞인 농담을 서로에 건넸다.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 좀 더 힘이 생겼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기대나 희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으로부터 언제든 새로 시작할 동력이 필요했다. 딸과 통화를 마치고 나면, 그때부터는 엄마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안쓰러움과 쓸쓸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여기까지가 부모 된 자의 한계며 감당할 몫임을 다시 깨달았다.


그날, 사수 변호사는 법정에서 딸이 변론하는 모습을 참관할 계획이었다. 로펌에서 변호를 맡은 여러 개 사건을 해결해야 되는 날이었고, 사수 변호사는 자신이 참석한 재판이 끝나면 딸이 있는 법정으로 오기로 했다. 하지만 사수 변호사 재판이 끝나기 전에 딸이 있던 법정 재판이 시작됐고 결국, 사수는 딸의 변론과정을 참관하지 못하게 됐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녀는 재판 휴정을 해서라도 자기를 기다렸어야 했다며, 참관하지 못한 상황을 물고, 의미 없는 소진을 이어갔다. 딸은 의연했지만, 이런 상황에 놓인 당사자가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우린 그 문제의 소유권에 대해 분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내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 것인지 말이다. 내 것이 아닌 문제를 끌어 와 상처받지 말자는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날 딸에게 전할 수 있던 최선의 위로였다.


그런 다음 날이었다.

우린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사수 변호사 앞으로 한통의 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메일은 생면부지의 어떤 이가 보낸 것이었다. 바로 그날, 그는 법정에서 딸의 변론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건에 연루돼 변호사 없이 몇 년 동안 지지부진한 재판 과정에 참석해 왔는데, 그날 딸이 검사와 판사를 상대로 끈질기게 변론하던 모습에 감동받아 메일을 보내게 됐다는 것이다. 덧붙여 당신 로펌의 연수생을 칭찬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세상에는 얄팍한 권위를 휘둘러 약자의 진을 빼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을 전하기 위해 어떤 이득도 없는 일을 실행에 옮기는 이도 있었다. 그는 일부러 딸이 속한 로펌을 찾아 메일을 보낸다고 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그는 실제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의 성공신화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이건 사실이었다. 누군가 딸을 지키고 돕는다는 마음이 들자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가 밀려왔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이 비로소 분명해졌다. 그가 아무리 감동받았더라도 메일까지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차라리 그 편이 훨씬 쉬웠다. 하지만 그것의 실행 여부와 그 결과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가,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교훈을 남겼는지 잘 모를 것 같아 아쉬웠다. 만약, 이 대단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의 삶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중히 간직할 것은, 어느 날 도착한 그 메일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 진심을 전할 용기를 낸 덕에 다른 존재가 다시 용기를 얻게 된 선순환 말이다. 이타적 동기를 가진 용기야 말로 가장 보드랍지만 단단한 알맹이였으며 결국, 세상은 소수의 그들이 낸 용기 덕분에 조금씩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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