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자칫 방심하다간 사슬을 놓치게 되거든. 뒤늦게 놓친 바늘 코를 발견했다면, 되돌아가는 시간이 아까워도 어쩔 수 없게 돼. 하지만 너무 실망할 건 없어. 그때라도 다시 뜨기만 하면 되니까.
아들은 약 때문인지 식욕이 줄고 잠이 늘었다. 그외엔 바늘 코를 어디서 빠트린 걸까? 고심하는 내 맘이 무색할 만큼 아들은 변함없이 운동하고 언제나처럼 친구들과 잘 지낸다. 지난주엔 친구들과 인간 탑 쌓기 콘셉트로 졸업사진도 찍었다며 보여줬다. 밝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아들 표정 어디에도 우울한 그늘은 찾을 수 없었다.
제주도는 며칠째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후텁지근해 연신 땀이 났지만, 습기 때문에 잠시 보일러를 켜고 선풍기를 꺼내 틀었다. 이제 5월이 됐을 뿐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 어느 때보다 명료한 상태를 유지했다. 매일 반복 돼 온 일상이지만 그동안 '의식하지 않던' 일상 속 루틴을 '의식하는 상태'에 두고 관찰하는 과정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 과정에서 나는, 그건 왜 그렇게 하는 거지? 싶을 만한 내 행동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아들과 나 사이 어디에서 바늘 코가 빠졌는지 알아차리고 싶었다.
평소 아침 알람은 아들의 등교 준비를 위해 6시 30분에 맞춰있지만, 대게는 6시 15분이면 눈을 떠야 했다. 고양이 라떼가 그즈음부터 나를 집요하게 깨우기 때문인데, 잠에서 빠져나와 겨우 눈을 뜨면 언제나 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던 라떼와 눈이 마주쳤다.
그 덕에 내가 매일 아침, 웃으며 침대를 벗어난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됐다. 라떼는 자동급식기에서 시간 맞춰 사료가 나온 것과 상관없이, 나를 곁에 두고야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마도 라떼의 아침 루틴일 테고, 나는 라떼가 원하는 데로 그녀의 아침 루틴에 동참했다.
그런 뒤 내가 무엇을 했나? 사실, 일어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을 알아냈을 때 의아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아마도 나는 그 행동에 대해 평소엔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거실 스탠드와 현관 전등을 켜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는데, 그건 마치 신전에 촛불을 켤 때처럼 경건하게 켜져서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종일 꺼지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심지어 거실에 아무도 없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아이들에게 불필요하게 켜놓은 전등을 곧바로 끌 것을 강조해 온 것과 비교해도 이 행위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로 시작되는 에너지 절약 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가끔은 이래도 되나? 마음이 불편해서 실제 불을 꺼보기도 했지만, 나는 어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불을 켜둬야 했다.
그저 취향인 걸까? 사실, 그동안 이 질문에 대해 밝은 게 좋기 때문이라고 말 할수 있었지만, 어두운걸 견디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선 나조차 깊이 생각하길 꺼려왔다. 하지만 의식하며 관찰하는 과정은 이 지점에서 어쩌면 빠트린 바늘 코에 관한 단서를 찾게 될지 모른단 여지를 주었다.
이 느낌을 당장 글로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온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글이 써 질리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교실로 오는 아이들과 자주 하는 방법인 '마인드 맵' 사슬 이어가기를 이용했다.
뜨개질하듯 A4 노트 가득 이어놓은 사슬 끝에서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불을 끄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것과 그것이 다름 아닌 결핍으로 강화된 행동일지 모른다는 작은 단서였다.
어릴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항상 집에 있었다. 하지만 불도 켜지 않고 커튼까지 드리워진 방은 땅속처럼 어두웠다. 엄마는 그곳에 죽은 듯 누워있었다. 엄마에게 어떤 지병이 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불러도 대답은 물론 기척도 없이 누워있던 탓에 어린 나는 엄마가 죽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었다.
딸깍, 아침마다 스탠드부터 켜던 내 행동의 밑바닥엔 여전히 어린 시절 경험한 두려움과 불안이 숨어 있었다. 이것이 그저 스탠드를 켜는 행위 정도로 끝났을 리 없었다. 불안은 내 무의식에 머물며, 내가 쥐고 있던 고리에 다음 고리 연결하는 걸 훼방 놓았다. 그 때문에 나는 수시로 바늘 코를 빠트렸고, 수없이 실을 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이미 나는 어둠 안에 죽은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스탠드 스위치를 눌러 두려움으로부터 회피했었다. 그 사이 두려움과 불안은 힘을 합쳐 나와 내 아이들을 향해, 얼마나 많은 것에 안된다는 부정적 메시지를 외치게 했나. 불안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면, 내 무의식 안에 머물던 불안부터 살피는 게 순서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말라고 말하는 동시에 이제라도 다시 걸어나가면 될 일이라고 가볍게 말해주고 싶었다.
더 이상 내 불안이 스탠드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스스로 어둠 안에 담담히 머물 때, 비로소 내 안에서 시작된 빛을 만날 수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