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아들이 뭐든 말해주길 바랐다.
아들이 우울증을 진단받은 뒤, 매일 저녁 아들과 마주 앉아 나눈 짧은 대화를 일지 형식으로 적기 시작했다. 막연하지만 아들이 내놓는 짧은 말을 모아, 이어 붙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였다. 하지만 뒤돌아 생각하니 이미 그 시작엔 판단이나 집착에 가까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다행이라면, 관찰자 시선으로 기록한 덕에 나와 아들 사이에 흐르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나 일기, 수필 형식으로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것은 아들을 향한 사랑이나 미안함, 부모로서 갖는 애처로움 같은 감정에 잔뜩 버무려졌을 것이다. 그뿐인가? 나는 과거의 기억까지 소환해 결국 늘 반복되던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감정을 배제한 대화일지 저변에는 이것을 온전히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부모는 사랑한단 이유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가 변하길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조종하기도 했다.
나와 다른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 같은 방식은 엄밀히 말해 공격이지만 부모라는 이유로 당연한 것이 되기도 했다. 과연, 사랑과 대치되는 감정인 공격을 동시에 가진 상태를 정말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되묻게 된다.
그동안 나는 내 불안이 아이들에게 건너가지 않길 간절히 바라왔다. 애초에 불가능했던 이 바람에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당면한 현실을 끝없이 밀어내며 통제하려던 것인데, 과연 내 아이가 나를 닮지 않을 방법이 무엇일까? 결국, 나쁜 부모만은 되지 않겠다는 강박과 집착이 만든 불안일 뿐이었다.
아들이 진단을 받고 내가 관찰 일지를 썼다고 해서, 곧바로 현실을 인지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던 건 아니다. 나는 몹시 실망해 좌절에 가까운 마음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아들의 상황을 나와 연결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방어했다. 불안정한 상태를 오가던 내게, 어차피 우린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으니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말해준 건 큰 딸이었다.
그 말은 단순하지만 울림을 줬다. 그동안 나는 관계 안에서 자식을 나와는 다른 타인으로 분류한 적이 있었나? 반문하게 하는 말이었다. 더구나 기준도 모호한 자식의 성공과 실패를 양육자의 성적표처럼 느끼는 순간, 부모의 사랑은 아이 존재 자체만을 향하지 못하고 몹시 기형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판단부터 멈춰야 했다. 내게 좋은 양육자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부터 내려놓아야 아이를 향한 무의식적 판단도 멈출 수 있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을 번번이 지난 과거와 연결 짓고, 타인이라 할 아이 삶에서 벌어질 일마저 나와 동일시하며 비약하던 그 마음을 버린다.
결국, 나는 아들이 마음을 앓게 되고야 온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런 나를 참 어리석다고 쓰려다 그만둔다. 그것 역시 시간을 되돌려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 말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피해자 거나 죄책감을 품은 가해자 사이의 줄타기에서 그만 내려온다.
더 이상 나는 과거의 피해자가 아닌 그 시간의 목격자이길 원한다. 더불어 현재의 관찰자로 오늘, 이 순간에 머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