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에 임하는 자세
증명은 정말 그런 것이 그렇게 드러나는 거였어!
매일 일지를 적고 있다. 이 과정은 수시로 나를 과거와 현재로 불러들여 단련시킨다. 나는 과거로부터 목격자의 거리감을 배운다. 그런 뒤엔 현재의 관찰자 시점에 안정적으로 도달하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건 사진 속에서 친구들과 밝게 웃던 아들의 표정이었다. 그토록 밝게 웃는데 어째서 우울과 공황증이란 말인지. 그렇다고 우울한 애가 그렇게 웃으면 되냐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혼란을 느낀 건 어디까지나 내 감정일 뿐이고, 나는 뭐든 우리 관계에 도움이 될 작은 단서라도 찾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는 집착을 끊기 위해 여전히 집착하는 모순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인간이 무언가 강렬히 증명하려는 행위야말로, 스스로 그것에 결핍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소유한 것을 욕망의 대상에 두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죽어 소멸되는 존재인 인간은 이 거대한 결핍의 한계를 넘기 위해 대를 이어 온 '증명' 그 자체였지만, 사는 내내 증명하기에 고군분투했다. 그것은 나란 존재가 여기에 있음을 알리려는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각기 다른 결핍만큼이나 인간의 증명 방식도 달랐다. 그것은 좋은 집이나 값비싼 자동차, 명예나 권력, 사랑을 통해 발현됐고, 어떤 이는 자신이 희생적인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가진 것을 포기하는 식의 극단을 표출하기도 했다.
증명해 보이려는 욕구는 자칫 우리를 오류에 빠트리기도 했다. 만약, 어린 시절에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은 연애나 결혼, 출산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원가족이 남긴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 결혼이나 행복한 가정에 대한 기대를 갖기 어렵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다고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는 통계를 본적 있다. 여기엔 인간의 증명하려는 욕구가 상황을 뒤집을 만큼 강렬한 것임을 보여줬다.
그것은 네가 네 부모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며 기어이 결핍된 상처를 건드리곤 속삭이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면, 학대 경험을 가진 존재가 제대로 된 양육 환경을 경험했을 리 없지만 결국, 증명하려는 강렬한 욕망 때문에 오히려 어린 나이에 결혼하거나 자녀를 많이 낳고 싶어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일이 명백히 잘못됐음을 증명해 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일은 부당했고 난 억울함을 덮어쓴 어린 아이였을 뿐, 내 잘못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야만 피해자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시절은 모두 다 그렇게 살았다는 말로는 나를 위로할 수 없었고, 사과받지 못한 마음은 증명하려는 마음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그 외엔 오로지 어머니와 나는 다른 사람이며, 나는 그녀와는 전혀 다른 양육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 시간이었다. 흔한 증명의 도구인 돈이나 명예, 사랑마저도 결국 소멸되고 마는 것처럼, 어떤 것이든 결핍을 대체한 증명은 결국 집착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마음에 뽑아내지 못한 가시만 키웠을 뿐, 우린 결국 각자의 삶을 살았다. 어머니도 당신 삶을 살았고, 나도 그랬다. 이제 내 아이들도 각자 자기 삶을 살 것이다.
며칠 동안 궁리가 많던 나는, 아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너는 이미 존재하는 그 자체인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타인의 시간을 넘겨다 보지 말자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너, 자신이고 네 마음이 담담해질 때야 제 속도로 걸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난 여기까지 말했고, 우린 마주 앉아 시답잖은 얘기를 좀 더 나누며 웃었다. 나와 아들의 하루가 저물었다.
증명하려 하지 않는 이상 시간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