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러지던 스콘처럼
요약문장:
어느 날, 문간방 아이들은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제 더 이상은 안된다고 결심이라도 했던 걸까? 그날, 잠자리채를 들고 변소에 간 문간방 아이들은 긴 막대 끝에 똥을 찍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과 닮았다. 강자에게 되돌릴 수 없는 분노는 방향을 잃고, 자신보다 더 약한 이를 향했다.
‘나는 너와 다르다.’
서로 같은 처지임을 인정하는 순간 생기는 연대를 부정하는 일. 그 위에 예리한 경계선이 그어졌다. 그 선은 같은 뿌리를 가진 이들 사이에 칼날처럼 놓였고, 약자의 싸움은 서로를 겨누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그렇게 폭력의 사슬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완성됐다.
그 길은 단순히 마당을 가르는 길이 아니었다. 문간방과 주인집을 가른 경계였고, 환대와 냉대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선이었다. 그 경계 너머엔 웃음과 놀이터가 있었지만, 언제나 우리 몫은 아니었다. 또래 사이에도 위계가 있었고, 그것의 시작과 끝은 내가 알지 못한 방식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외부로부터의 차별을 경험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에 맞선 봉기를 시도했지만, 그것은 아주 작고 서툰 반격이었다.
개집은 대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는 길목 한가운데 있었다. 큰 개는 목줄에 묶여 있지만, 여섯 살 아이에겐 그 앞을 지나는 게 오금이 저리게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세 들어 살던 문간방까지 가려면 반드시 그 개집 앞을 지나야 했다. 얼어붙은 채 개 집 앞에 서 있다고 해서 손 잡아 줄 어른은 없었다. 오히려, 묶여 있는 개가 뭘 무섭다고 그러냐는 불호령이 떨어질 뿐이었다.
나는 개집을 겨우 벗어나 눈을 질끈 감고 달려, 나무 대문의 높은 문턱을 단숨에 넘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개가 바짝 쫓아왔을 것 같은 두려움에 등이 서늘했다. 그곳에 우리가 살던 단칸방이 있었다. 주방이 없던 문간방 앞에, 곤로와 냄비, 소꿉장난감 같던 조리 도구 몇 개가 부엌살림의 전부였다.
문간방을 거쳐 주인집 마당으로 가는 길목에는 미닫이 문이 있었다. 절반이 유리로 된 그 문으로 넓은 마당과 주인집 아이들이 평화롭게 노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함부로 넘어갈 수 없는 경계였고, 차별이 명확한 구조물이었다.
주인집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 둘과 두 살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순옥이라는 열여섯 아니면 한 두 살 더 많았을 나이의 가정부가 집안일을 도우며 아이들을 돌봤다. 요즘으로 치면 한창 사춘기였을 순옥은 손재주가 꽤나 좋았고, 나중에 미용사가 될 거라고 했다.
우리 남매가 순옥이 허락하에 주인집 마당에서 놀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순옥이의 ‘연습용 가발’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순옥이는 실핀 몇 개만 있으면 단발도 커트도 아니던, 내 더벅머리를 올림머리로 만들 수 있었다.
문간방 아이들에게도 마당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순옥의 통치 아래 있던 마당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순옥이는 주인집 아이들과 우리를 다르게 대했다. 놀이 순서에서도 항상 문간방 아이란 이유를 들어 뒤로 미루거나, 끝까지 기다리게만 하고 놀이를 끝내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하면 순옥이도 어린애에 불과했지만, 순옥이는 무척 집요하게 문간방 아이들을 괴롭혔다. 우린 어른들이 없는 곳에서 순옥이에게 멱살이 잡히고 수시로 쥐어 박혔다. 어른들에게 알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우린 본능적으로 그 말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순옥이의 악행을 어른들에게 발설하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순옥이는 간혹 자신이 만든 머리핀을 들고나가 좌판을 펼쳤는데, 나는 그 곁에서 코를 찔찔 흘리며 순옥이가 시키는 대로 "이거 사세요."를 외쳐야 했다.
어느 날, 문간방 아이들은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제 더 이상은 안된다고 결심이라도 했던 걸까? 그날, 잠자리채를 들고 변소에 간 문간방 아이들은 긴 막대 끝에 똥을 찍었고, 순옥이 방에 깔린 꽃무늬 이불에 똥으로 방점을 찍었다.
차별에 대항한 유치한 반란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완전범죄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 엄마가 주인집 마당에서 순옥이의 이불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고야 모든 게 끝났음을 알았다. 그 후로 더 이상 그 마당에서 놀았던 기억은 없다.
구조 속의 약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른 약자와 거리를 둬야 했다.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적 폭력’처럼, 강자에게 직접 맞서지 못한 약자가 자신보다 더 약한 자에게 위계를 재현하는 방식말이다.
순옥이는 아마도 자신이 주인집 울타리 안에 속한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선, 울타리 밖의 문간방 아이들을 철저히 분리시켜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위계 속에서, 순옥은 쉽게 아이들의 멱살을 쥐고 편 가르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제 돌아보면, 개집도, 유리 미닫이문도, 순옥이의 손길도 모두 사회라는 더 큰 마당에서 마주할, 수많은 경계와 권력의 예고편이었다. 그 당시, 사회적 약자였을 순옥이의 폭력도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모방이었다. 어린 나는 아직 그 말을 몰랐고, 꼭꼭 씹어봐도 자꾸 목이 메는 그런 기억은, 한 입 베어 물면 부서지는 스콘처럼 입안에서 부스스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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