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요약문장:
어른이 할 일은 완벽한 그림을 대신 그려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스케치북이 너무 일찍 채워지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때론 완벽한 그림보다 지워진 자국 위에 쌓아 올린 그림이 이야기를 더 진실하게 만든다. 아이의 삶은 흰 종이에 남겨진 흔적처럼 시행착오와 실수, 다시 고쳐 쓴 흔적 위에 쌓여 갔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온전히 아이의 몫만은 아니다. 어른의 말 한마디는 아이의 새 하얀 스케치북 위에 잉크처럼 번졌고, 때론 지울 수 없는 자국이 됐다. 그런 탓에 아이의 그림은 자신이 그리고 싶던 것과 어른이 남겨놓은 그림자 사이에서 흔들리며 완성됐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했다.
“얘들아, 너희는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스케치북과 같단다. 이제부터 여기에 너희가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는 거야.”
그날, 선생님 얼굴과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선생님의 말씀과 그 말을 듣던 그 당시 내 마음까지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정말 내 스케치북도 아직 깨끗할까?’ 그때 나는, 집에서 자주 매를 맞고 쫓겨나던 아홉 살 아이였기 때문에 선생님 말을 단번에 믿을 수 없었다. 다만, 선생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나를 위로하는 희망이 돼 주었다.
어떤 말은 때로 늙거나 죽지도 않는 생명처럼 우리 안에 살았다. 훗날 글쓰기 선생님이 된 나는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내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희는 이 하얀 스케치북과 같아서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단다.”
나는 그 말이 다시 희망이 돼, 아이 마음에 닿는 순간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물론, 내겐 그와 상반된 기억도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용돈을 아껴 담임 선생님께 박카스 한 병을 사다 드린 날이었다. 그날 나는 난생처음 주는 것에도 기쁨이 있단 걸 처음 알게 됐다. 작은 병 하나를 손에 쥐고 달려가던 순간, 쿵쾅대는 심장과 온몸의 전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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