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삶이라는 루머

무엇이 되든

by 은수

제주도엔 어제부터 비가 내렸다. 여름날 사나운 태풍을 닮은 봄비였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비는 오늘 아침을 지나더니 그쳤다. 곧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이 거짓말 같은 날씨는 마치 요즘의 내 심리 상태를 표현하려는 것 같다. 마음에 잿빛 구름이 들어 찬 날은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면 연쇄적으로 태풍이 몰려와 온 맘을 흔들어 놨다.


나는 요즘 하루 대부분의 시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팟캐스트를 듣는다. 그러다 보면 어렵지 않게 하루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살만해졌다. 그것은 나를 달래는 일이 그럭저럭 잘 진행되고 있단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찾아낸 문장들 사이로 가끔 해일 같은 문장이 덮쳐올 때가 있다. 최승자의 시 <일찍이 나는>을 다시 읽던 밤이 그랬다.


[일찍이 나는 ]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대는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을 천 년 전에 죽은 시체에 비유했다. 하지만 나는 그 죽음의 이미지 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봤다.

약속한 오후 시간이 되면 어린이들이 교실로 왔다. 그들은 종일 가라앉았던 공기를 단숨에 바꿔줄 만큼 힘이 세다. 난 힘센 어린이들 덕에 잠깐이나마 생기를 되찾고, 생명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작정하고 보고 들으려니, 읽어야 할 것도 봐야 할 것도 참 많다. 나는 그날 읽고 보고 들은 것은 꼭 정리해서 글로 적어둔다. 그러다 보면 어떤 작은 씨앗 같은 게 내 안에서 꿈틀대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시 내 글이 됐다.

시, 수필, 소설이 됐고, 일기가 되거나 감상문이 됐다. 장르가 무엇이든, 형식이 무엇이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 되기보다 오늘, 무엇이든 썼으니 된 거였다.


[나를 달래는 기록 #6]

우리도 애초에 무엇이 되든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되려고 태어난 사람은 없었고,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이다. 살기 위해 써 내려갈 뿐이다.
더구나 삶은 타인에겐 루머에 불과한 것일 뿐이니, 자책은 하지 말자고 나를 달랜다. 입술 위를 떠도는 루머보단 내 손끝에서 태어나는 한 줄 문장의 진실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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