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방패
어릴 때부터 말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덕분에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반장과 전교 회장을 이어 왔으며, 고3 때는 정년을 앞둔 정치 선생님으로부터
"이년은 하다못해 아파트 부녀회장이라도 할 년이여!"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나는 어떤 말을 잘했던 것일까?
마흔을 넘어 세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 되면서 사춘기에 접어드는 첫째 아들을 통해 내 모습을 반추할 일이 잦아졌다. 아들은 엄마가 '잘하는 말'과 '잘하지 못하는 말'을 알려주었다.
내가 잘하는 말과 잘하지 못하는 말?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에게 많이 시달린다. 둘째는 첫째에게 소리도 잘 지르고, 싸움을 자주 걸어온다. 우리 집에서 가장 말썽을 많이 부리는 둘째 아들은 우리 부부의 골칫거리이다. 첫째는 나와 동네 산책을 하면서 동생이 왜 그런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엄마, 엄마가 서후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서희에게 많은 사랑을 주시는 거, 왜 그러는지 저는 이제 이해하거든요.
제가 서후만 했을 때는 사랑만 받는 서희가 부럽기만 하고, 왜 엄마는 나를 돌아봐 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젠 이해해요. 엄마가 왜 서희한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야만 하는지.
저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싶지만 엄마의 생활을 아니까 이젠 많이 괜찮아졌거든요. 그런데 서후는 아직 저보다 어려요.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엄마가 서후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서후는 그 사랑을 저한테 기대하게 돼요. 왜냐하면 저는 서후 말에 대꾸해 주잖아요. 서후랑 놀아주는 사람이 우리 집에서 저밖에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제가 너무 힘들어요. 엄마가 서후에게 더 많은 사랑을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첫째 아들의 고백은 막내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이 아이가 겪어 온 모든 아픔을 숙성시킨 막걸리 같았다. 뽀얀 색깔, 시큼한 향과 달콤한 맛으로 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둘째에 대한 미안함보다 첫째 아들이 생각하고 또 깨닫고 이해하기까지 견뎌야 했던 시간에 대한 미안함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동안 아들들에게 사랑한다는 말보다 어떤 말을 자주 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두 아들에게 "청소하라"는 말을 잘한다.
세 아이가 집안을 어지르면 10분에 한 번씩 집을 치워도 처음과 비슷하다. 몇 년간 이어진 이 상황은 이젠 회초리를 들고 고래고래 꽥꽥 협박을 해야 겨우 절반 정도 해결이 된다.
나는 두 아들에게 "같이 놀지 마"란 말을 잘한다.
두 아들은 자주 같이 놀고, 자주 같이 다니며, 자주 싸운다. 둘이 붙어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아이들이 내게 와서 상대에 대해 고자질하는 시간도 길어진다. 그럴 때마다 둘을 불러 이유를 묻고 화해시키기를 또 몇 년간 하다 보니 이젠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말고 서로 같이 붙어 있지 말라는 말로 끝을 낸다.
나는....
나는 또....
아이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잘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이 마음에 상처를 내는 창이 되었구나' 싶다.
그동안 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주의가 산만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었고, 수행평가 점수가 잘 안 나왔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친구들이 우리 아이만 놀리는 게 싫어서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이러니까 네가 이런 말을 듣지! ", "너 이번에도 이러면 네가 키우는 곤충들과 아끼는 장난감을 버릴 거야!", "너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등등 아이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내는 뾰족한 창을 들이댔다.
아들을 둘이나 키우면 엄마가 헐크가 되어야 한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나를 합리화하며 집 밖에서 내 아이가 잘했으면 싶은 바람을 날카로운 창에 실어 던지곤 했다. 아이들의 감정은 뒤로 한 채, 밥을 해 주고, 청소를 해 주고, 싸움을 말리고, 수행평가를 잘 보게 하는 게 엄마라는 사람 즉, 내 모습이다.
두 아들을 낳고 셋째로 태어난 막내딸은 선천적으로 여러 문제를 안고 세상으로 나왔다. 여러 문제들 중에서 우리 딸의 신분증과 같은 복지카드에 적힌 글자는 "언어장애"이다. 우리 가족은 또래보다 여러 면에서 느린 이 아이를 애벌레라고 믿고 있다. 언젠가는 꼭 멋진 나비가 되어 세상을 날아다닐 아이라고.
이 애벌레에게는 필요한 것이 많았다. 많은 말을 해줘야 했고, 많이 안아줘야 했다. "사랑한다", "괜찮다", "씩씩하고 용감하다", "잘했다" 등의 말을 많이 하며 키웠다.
이 애벌레는 여섯 살이 되면서 2~3 어절의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살이 된 지금은 부정확하긴 하지만 4 어절을 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이 애벌레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서 하는 말.
"엄마, 서희가 엄마 배에서 뿅 하고 나왔어?"
"응, 서희가 엄마 배에서 뿅 하고 나왔지."
"흐흐흐. 엄마, 안아 줘."
"그래, 이리 와."
"엄마, 기뻐. 엄마가 나를 낳아줘서 행복해."
이 말을 듣고 잠시 멍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자기감정 표현을 전혀 못하던 아이였다. 여러 음절을 붙여서 한 문장으로 말하는 것도 어려운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만드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년간 똑똑하고 건강하게 자라 주는 두 아들에게 자주 했던 말은 아이들의 마음을 찌르는 창이 되었다. 반면 태어나던 날부터 중환자실과 수술실을 오가고, 느린 발달로 치료실을 학원처럼 다니는 딸에게 자주 했던 말은 세상의 손가락과 상처를 막아주는 방패가 되었다.
엄마의 말을 방패 삼아 자란 딸은 세상을 향해 나쁜 말을 할 줄 모른다. 또래보다 언어, 인지, 신체발달 등 모두 느린 애벌레이지만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지 않으며, 자신이 그동안 들어온 말들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할 줄 안다.
첫째 아들이 말한 둘째 아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싶다. 아들들이 학교에서 듣게 되는 수많은 말들은 분명 크고 작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인 나는 그 말들을 듣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로 더 큰 상처를 주었다.
이젠, 그 창을 나 스스로 부러뜨릴 차례다. 그리고 아이들이 세상이 주는 아픔과 상처를 스스로 막아낼 수 있는 든든한 방패를 만들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겠다. 두 아들 모두 멋진 나비가 되기 전 어둡고 좁은 번데기가 되는 용기를 키우도록 도와줘야지. 세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다닐 봄날을 기다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