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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모 Jun 18. 2024

나의 나르시시스트 아빠

어린 내가 봤던 아빠는 툭하면 엄마와 나에게 화를 내는 다혈질이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유로, 그저 본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자신의 감정이 전부 분출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곤 했다. 자주 화를 내고 가끔은 나와 동생을 때리기도 했다. ‘어디 감히 나한테‘. 아빠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12살 때 노트북을 하다가 아빠가 모르는 여자와 나체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정말 안타깝게도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 속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며 바람을 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생각했던 건 엄마의 감정이었다.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본 것을 엄마한테 말해야 하는지 3일 동안 고민했다. 결국 엄마에게 말을 했고 아빠는 그 후 며칠간 우리 모녀의 눈치를 보며 지냈고 곧이어 다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사업을 했다. 아빠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일을 해왔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모른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건을 파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불법적인 일 같지도 않다. 회사와 회사를 이어주는 여하튼 복잡한 일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한번 일이 잘되면 큰돈이 들어오고, 일이 없으면 돈을 벌지 못하는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부터 아빠는 회사를 차리고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해 친할머니 그리고 엄마와 외할머니에게까지 돈을 빌리기를 반복했다.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우리 가족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신도시의 집을 담보로도 몇 억 대출을 받았다(끝까지 갚지 않았다). 아빠 일은 잘되다가 안되다가를 반복해서, 엄마와 우리 자매는 불규칙한 생활비로 인해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엄마는 아빠가 주는 생활비가 아빠가 빌려간 돈의 이자로 전부 다 나간다며 항상 돈이 없다고 했고 아빠는 생활비로 그 정도를 주는데 엄마가 쓸데없는 데 돈을 쓰며 낭비벽이 심하다고 했다. 여하튼 그런 문제로 청소년기 나는 우리 집이 잘 산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빠가 만든 부채로 한 달에 이자만 몇 백만 원이 나가고 돈을 벌어도 원금은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아 불안한데 이게 가난이 아니면 뭐겠는가.


그런 와중에도 아빠는 명품이 아닌 옷은 입지도 않고, 유흥업소에 다니며 돈을 썼으며(내가 중학생 때 유흥업소 직원이 우리 집에 선물을 보낸 적도 있다..;) 남들에게 빌린 돈을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방황을 했다.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이런 방황이 아니었다. 내향적이고 예민했던 나는 또래들과 어울려 일탈을 하는 방식보다 집에 틀어박혀 등교 거부를 하는 쪽을 택했다. 반년 동안 학교도 학원도 가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그때 당시엔 내가 힘든 게 엄마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로 존재하는 게 너무나도 버거웠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너무나도 이상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돼서 그것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엄마에게 대학병원 정신과에 가서 뇌가 이상해진 건 아닌지 mri를 찍어보자고 할 정도로 그 시기의 나는 망가져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양육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딱 그 시기에, 아빠의 일이 풀렸다. 아빠는 등교를 거부하며 겨우겨우 중학교 졸업을 한 나에게 차라리 유학을 가라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당시 난 인생의 변화를 필요로 하던 차였다. 17살, 어렸던 나는 유학에 가서 부모와 떨어지면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기대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지.


17살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유학을 떠나 시도 때도 없이 난관에 부딪혔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아빠는 유학 1년 차부터 내 학비를 제 때 보내주지 못했다. 홈스테이 비용을 매달 밀렸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1년 치 학비를 기간 내에 내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갈 뻔했다.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서 엄마나 아빠나, 내 현지 보호자와 홈스테이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빠한테 전화해서 돈을 보내달라고 하면 언제까지 보내주겠다고 하고 그게 다였다. 홈스테이 주인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눈칫밥을 먹으며 쫓겨나진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정신병이 나아지길 개뿔,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알바라도 해서 생활비에 보태고 싶었지만 그 당시 고등학생이 학생 비자로 알바를 하는 건 불법이었다. 지하방에 숨죽여 울면서 부모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우리 엄마 아빠를 진심으로 원망했다. 돈이 없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죄송함과 눈칫밥 같은 건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건 딸을 타지에 보내놓고 한 치 걱정도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 부모였고 이때 나는 우리 부모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를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일단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 지금보단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다. 타지에서 중증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매일매일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이 상태로 한국에 가면 대학도 못 가고 망한 인생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한계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코로나가 터졌다. 내 주변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난 정말 갑작스럽게 3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남은 한 학기는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으며 졸업헀다.


20살, 돌아와서 보게 된 집안의 상태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아빠와 동생은 그 사이 집을 나갔고 40평대 넓은 집을 엄마 혼자 쓰고 있었다. 방 하나는 엄마가 당근마켓에서 사모은 중고 옷으로 가득 차있었고 좀이 기어 다녔다(엄마의 이야기는 전 글에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하루는 테이블에 관리사무소에서 보낸 종이가 와있길래 읽어보니 우리 집이 수개월간 관리비를 내지 않아 다른 세대들이 그 비용을 나누어 내고 있으며, 어떤 설명도 없이 이런 연체행위가 지속되는 상황에 대해서 더는 가만히 둘 수 없어 수도와 전기를 끊겠다는 글이었다. 그 글을 보고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곧 낼 거라고 했고 나는 당장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놀란 외할머니가 엄마를 시켜 경비실에 가 연체비용까지 합산해 돈을 낸 이후에야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내가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자 엄마는 아빠가 돈을 안 줘서 그렇다, 주는 돈이 다 이자로 나간다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 엄마와 아빠의 어긋난 경제관념,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지만 어른으로서 기본적인 것도 처리하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난 한없이 무력해졌다. 미친 듯이 불안했다.

그 당시 아빠의 일이 망해서 집 대출의 이자를 갚지 못해 집이 경매로 넘어갈 뻔했고, 외할머니에게 1억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아빠 일은 어떤지, 돈 갚을 생각이 있는 건지 얘기만 물었다. 미칠 것 같았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원해서 한 선택이 아니었다. 일 년에 5천만 원이 넘는 대학 학비를 무슨 수로 내가 대겠는가?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내 말에 아빠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극구 반대했다. 4년 내내 대학 학비를 보내주겠다고 단언하지도 못하면서, 그럴 수 있는 환경도 아니면서, 현지의 대학에 가라는 말만 계속 해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 남들은 유학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행복한 줄 알라 ‘는 거였다. 유학을 보내주면 당연히 가지. 유학을 안 보내주는데 알아서 가라고 하니까 문제인 거지, 이 사람아. 속으로 한바탕 욕을 하고 어느 대학에도 등록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집이 망했는데 자신의 명예 때문에 현실감 없이 나를 또 불구덩으로 밀어 넣으려는 아빠가 죽도록 미웠다.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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