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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모 Jan 24. 2024

나의 ADHD 엄마

 나는 엄마의 집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물건들, 청소한지 1년은 넘어보이는 더러운 화장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음식들이 가득 차있는 냉장고, 옷방에 가득 차있는 옷들. 그 옷 속을 기어다니는 좀벌레들. 내가 자란 그 곳은 몇 년간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내 발걸음을 끊게 하기 충분했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생 때 집을 나갔다. 당시 난 해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별거한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원래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나와 동생이 아주 어릴 적부터 그 둘은 매일같이 싸웠다. 항상 아빠가 먼저 화내는 쪽이었다. 아빠는 항상 엄마가 집안일을 못한다고 욕했고, 엄마는 아빠가 사업한답시고 외가에서 1억을 빌려다가 날려먹고 몇 년째 모르쇠하는 걸 말했다. 실제로 엄마는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았고 아빠는 사업하다 망해서 양가 모두의 돈을 날렸다. 어릴 땐 집에서 화만 내고 신경질을 부리는 아빠가 주양육자인 엄마보다 몇 배는 싫었다. 중학교 때까지 아빠가 밤 늦게 들어오는 도어락 소리에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 지금은 아빠가 좋으냐 싫으냐를 떠나 그 심정을 5%정도는 이해하게 되었다. 그 때의 아빠처럼, 어른이 된 나는 엄마를 볼 때마다 화가 나기 때문이다.


 엄마가 ADHD라고 의심하게 된 건 내 ADHD를 의심하면서부터다. 21살, 고등학교 이후로 거의 2년동안 쉬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우울증이 심할 때였다. 공부를 하려고만 하면 딴 생각에 10분조차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하루에 14시간 정도를 잤다.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흘려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하루 의미없이 마주한 시간들을 비생산적으로 흘렸다. 유일하게 시간을 살아가는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뿐이었다. 공부를 하려고 앉으면 뇌가 자꾸 트라우마적 기억을 소환하는데, 좋아하는 일을 할 때면 5시간이고 10시간이고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걸 알고 있는데, 몸과 정신이 따라주지 않았다. 눈 앞의 행복을 찾아서 지금 당장 나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만을 좇았다. 완전히 놔버렸으면 편했으련만, 공부를 안함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불안과 자괴감 또한 컸다. 그러던 중 '조용한 adhd'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내가 우울증 뿐 아니라 adhd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정신과에 가보니 의사가 우울증으로 인한 인지 저하일수도 있고 ADHD일 수도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찌됐든 나는 adhd약을 처방받았다. 결론적으로 약을 먹고 많이 나아졌다. 방에 널부러진 더러운 것들이 보이고, 처음으로 '방청소'라는 걸 주기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해졌고, 시간 개념이 생겼으며, 공부할 때도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이지만 사람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았던 거야? 지금까지 인지 저하 상태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그리고 엄마가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한다고 해도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들여서 억지로 꾸역꾸역 했다. 예를 들어 집을 청소하는 것 -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 정리를 하고, 안쓰는 물건을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 등 - 살아가면서 누구나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일들을 너무나도 힘들어했고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집은 항상 지저분했고 쓰레기더미였다. 아빠는 항상 어린 우리에게 엄마를 도와서 청소와 정리를 하라고 했지만 나와 동생은 청소를 어떻게 하는지 직간접적으로 배우지도 못했고, 더러운 집에서 생활하는 게 일상이었으므로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에 반해 엄마는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음악 전공자였던 엄마는 동네의 비전공자 아주머니들과 몰려 다니며 음악연습실을 차리고 하루종일 노래와 오카리나 같은 악기를 연습했다. 아침이면 캐리어에 짐을 싣고 뒷좌석이 짐으로 꽉 찬 차로 짐이 꽉 찬 연습실에 가서 밤 늦게 집에 돌아왔다. 부산스러운 정신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엄마는 항상 지게꾼마냥 짐을 가지고 다녔다. 한번 외출할 때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엄마 외에 본 적이 없다. 엄마는 몇 년간 매일 가는 길도 네비게이션이 있어야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또 돈이 있을 땐 당근마켓으로 중고 옷가지들이나 생활용품을 사모았는데, 그렇게 산 옷들이 방 하나를 옷방으로 만들어서 보관해야 할 정도로 많았다. 그 옷방에 좀벌레가 퍼져서 옷에 벌레가 기어다녀도 엄마는 원래 집에 있는 벌레라며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옷이 너무 많아서 버리라고 하면 다 입는 옷이라며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했을 때 엄마는 눈 앞의 '자극'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엄마는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핸드폰을 체크하곤 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 알람. 어떨 땐 당근마켓 키워드 알람, 어떨 땐 코인, 어떨 땐 SNS, 어떨 땐 다단계를 하면서 자극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걸로 보였다. 내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또한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관심이 없었다. 중학생 때까진 밥이나 간간히 차려줄 뿐, 먼저 얘기를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학교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등을 궁금해하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마의 관심사는 오직 음악 뿐이었다. 그렇다고 인정받는 수준급의 연주자도 아닌(조금이라도 존경할 면이 있었으면 좋겠다), 오카리나와 칼림바 등을 다른 비전공자들 아주머니들보다 더 열심히, 잘하는 정도였다. 엄마는 학교 방과후 수업과 한 건당 많아봤자 10만원 페이를 받는 인맥공연을 하며 간간히 돈을 벌었다. 엄마의 핑계는 '워킹맘'이라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연습실에서 음악 연습을 하고, 돈을 버는 건 일주일에 20시간도 안되면서, 엄마는 자신이 마치 높은 커리어를 가진 직장인인 것처럼 어떻게 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하냐는 핑계를 댔다. '넌 엄마가 집에만 틀어박혀서 청소만 했으면 좋겠니?' 한 번도 사춘기와 입시철을 보내는 나와 동생을 위해 좋은 환경을 조성해줄 고민도 해본 적 없으면서, 집안일과 돈을 버는 것 중에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을 한 것도 아니면서, 돈을 버는 것과 집안일 그 무엇도 제대로 해본 적 없으면서 집에서 일하는 엄마들을 깔보고 본인이 못하는 그 노동을 저평가한다는 게 짜증이 났었다. 엄마의 핑계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 자취하며 집안일을 스스로 하며 혼자 살 때의 집안일이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힘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발전했다.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 다 잘하면 슈퍼우먼이게?'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생활양식을 가지고 사는지는 엄마의 알 바가 아니었다. 자식에게조차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세상은 그만큼 좁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때 쯤 엄마가 ADHD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엄마의 모습에서 예전의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 건 뇌에서 거부하여 엄청난 에너지가 들고, 하루살이마냥 눈 앞에 보이는 즐거움만을 쫓아서 살며(우리 모녀에겐 음악이었다), 더러운 방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그러므로 방청소를 생각조차 못하는, 정서불안으로 일상이 망가졌던 과거의 내가 생각났다. 엄마에게 정신과 진단과 치료를 권유했다. 엄마는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며 거부했다. 정신질환을 진단받을 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주변인들을 그렇게 힘들게 하면서 눈과 귀를 막고 자신에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슬프게도 난 엄마와 많이 닮았다. 다른 점은 난 자기객관화가 더 잘된다는 점. '해야 하는 것'에서 도망치지 않고 부딪힌다는 점이다. 엄마는 해야만 하는 일에서 도망치며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 결과는 나와 내 동생의 정서불안이다. 매일같이 약속에 늦는 엄마. 너희 엄마는 왜그래? 라는 타인의 시선. 엄마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우월감의 잘못된 표출. 자식에 대한 무관심. 세상을 보는 편협한 시선. 

 난 17살에 유학을 시작해 집을 나와 홈스테이를 하며 살았고 기숙사를 전전하다 23살 때 처음으로 온전히 자취를 하게 되었다. 동생 또한 고등학생 때부터 집을 떠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동생은 중학생 때부터 엄마와 대화를 단절했다(여담이지만 우리 집엔 내 방과 동생 방이 없었다. 집이 좁아서가 아니다. 우리 집은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안방과 다락방을 포함해 방 4개인 40평대 집이었다. 문제는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하나는 옷방, 하나는 공부방 식으로 용도에 따라 방을 공사해서 각 방에 침대가 들어갈 자리도, 책상이 들어갈 자리도, 옷장이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아직도 부모가 무슨 생각으로 인테리어 공사를 그런 식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무 생각 없었겠지. 강압적인 아빠에게 초등생이었던 우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이 없었던 우리 자매는 한창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방과 방을 옮겨다니며 살았다. '내 공간'이 없고 사는 곳에 대한 무력함이 우리를 지배했었다). 난 17살에 집을 떠나고 싶어서 유학을 선택했다. 고등학교 시절 유학이 소원이었다던 아빠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날 무리해서 유학보냈다. 그 결과는 언젠가 글로 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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