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변기 20분

by 오세준

화장실 좌변기에서 20분 앉아있었다.
와이파이만 되는 아이패드를 들고 갔더니 웹소설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구글포토에 싱크된 앨범에서 지난 사진들을 보았다.

연애하고 결혼해서 연두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사진이 반,
연두가 태어난 후의 사진이 반이었다.
그렇게 앉아서 지난 사진을 보았다.

지난 사진 속 나와 유민이는 꼬옥 달라붙어있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사진 한장한장에 듬뿍 담겨있었다.
맞다. 우리는 연두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참으로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쭈욱 스크롤을 내리다보니 연두 사진이 나왔다.
미소가 배시시 흘러나왔다.
연두는 너무나도 작고 또 작았지만 지금의 얼굴 그대로 울고 웃는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첫번째 목적지는 정해져있다.
XX 빌라 XXX호.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다시 한 번 갓난아기인 연두를 안고 그 체온을 느끼고 냄새를 맡고 볼을 부비고 싶다.

스크롤은 계속 내려갔다.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할 때의 모습들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 속에는 내가 평소에 잘 보지 못했던 연두의 또 다른 삶이 담겨있었다.
즐거운, 짜증난, 피곤한, 좋아하는, 싫어하는, 귀찮은, 신기한, 낯선, 새로운, 두려운, 졸린...

잠시 연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백업에 이상이 있는지 한 2년의 시간이 비워져있고 올해 찍은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보는 요즘의 연두 모습과 가장 비슷한 사진들을 보며 올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돌아봤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속에서 연두는 자라고 있었다.
조금씩, 하지만 빠르게.
왠지 좀 서운하다...

그래서인지 갓난아기 때 옆으로 누워 잠든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여전히 똑같은 걸보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아, 사진 속의 나는 세월이 느껴질만큼 변해있었다.
대학생 소리까지 들었던 청년은 이제 빼박 아재가 되어있었다.
아픈 곳도 다친 곳도 더 많아졌고 목의 주름도 선명하다,

대략 인생의 절반지점까지 온 느낌이다.
축구로치면 전반전 농구로치면 2쿼터가 끝난 느낌이다.
이쯤되니 대략 지금까지의 경로로 미루어본 나머지 삶이 대강 그려진다.

선택의 여지는 있지만 그 선택지가 그리 많진 않다.
정답을 고르긴 쉽지만 정답을 살기는 참 쉽지 않다.
하지만 지난 사진 속 순간들을 보니 알겠다.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다보면 하나 둘 사진이 쌓일 것이고,
사진 속 나와 유민이, 그리고 연두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웃고 있을 것이며,
나는 다시 한 번 20분간 혹은 그 이상 좌변기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할 것이다.
.
.
.

덧. 혹시라도 바깥에서 '비데'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좌변기 자리가 비기를 기다린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