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로서 남자의 고통에 공감한다.

by 오세준

지난 몇 년 간 과제를 채점하다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교사에게 학교 폭력 사실을 알렸으나 묵살당하고 축소되어 큰 충격을 받고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이야기
-남자친구의 가스라이팅에 몇 년의 시간을 고통받다가 겨우 탈출하고 새 삶을 시작한 이야기
-엄마로부터 사랑받고자 애썼으나 끝끝내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한 짝사랑 이야기

그 밖의 온갖 폭력적인 관계 속에서 사람에게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고통받고 상처받고 이런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내가 진실로 가슴 아픈 것은, 과제 속에서 보인 남자들의 이야기가...


관계 속의 상처를 돌아보고 그로 인해 느꼈던 고통의 자각보다는 언제나 '난 괜찮아', 그리고 '난 이겨냈어'로 끝난다는 거.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타자화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올라선 자신의 영웅서사에 집중되어 있다는 거...


그들의 이야기에는 고통의 디테일이 없고 항상 추상적인 깨달음만이 존재한다는 거. ㅠㅠ


반면, 여자들의 이야기는 고통에 대한 디테일한 자각이 있고 관계망에 대한 통찰이 있으며 '난 괜찮아'로 퉁치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영웅서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성장과 회복의 서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거...


글 안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그동안 길러낸 남성성(masculinity)가 얼마나 정신건강에 유독한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들이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자신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억누르고 '난 괜찮아'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상담현장에서 오래 구른 여성 상담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들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자비심'을 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여성 내담자들의 고통어린 사연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 고통을 말로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남성 내담자들의 미숙함에 눈이 가게 되늕 것이다.


그래서 여성 상담자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남자들이 참 불쌍해'라는 말을 듣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남성들이 겪어온 인생사와 그 속의 고통들은 여성 동지들 못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이른바 '남자'로 이 사회에서 기능하고 존재하기 위해서 버리고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 중 고통의 자각, 타인의 상처에 대한 감수성, 정서적 다양화 등 정서적 역량은 집중적으로 키워야 할 역량이다.


그래야 남자도 산다.


과제를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어째서 누군가는 자신의 속에서의 다채로운 감정과 관계망의 변천을 세심하게 돌아보는데, 다른 누군가는 단조로운 서사로만 일관하는가.


그리고 왜 항상 단조로운 서사의 성별은 남성이 대부분이란 말인가.


가슴이 아프구나.


나는 남자로서 남자의 고통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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