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하고 와이프의 임신-출산-육아 과정을 보면서 깨달은게 하나 있지.
아! 나는 잉여로구나!!!
잘 서포트하면 유익한 존재지만
그렇지 못하면 없는게 나은 존재로구나!
사실 이거 때문에 살짝 우울감도 왔었다.
세상 살면서 그동안 쭈욱 나님이 1순위였는데,
애 갖고 부터는 수직하락해서 아내=연두 >>>> 나놈이
된 것이다 ㅋ
임신한 동안 물론 아내 심신 케어하고 드시고 싶은거 조달하고 퇴근길 자가용으로 모셔오는 등 나름 최대한 노력하고,
출산 과정에서도 휴가 내고 옆에서 호흡 따라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했지만,
나는 그 전 과정에서 주체는 아니었다는 거.
철저한 조력자로서 아내의 곁에 있었지 내가 낳은 건 아니라는 거.
솔직히 말해서 출산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정도였다.
아이가 하루하루 뱃속에서 커가고 또 그 아이와 소통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그 경이와 신비를 옆에서 나는 관찰자로 겪은 것이지 주체가 되어 겪은 건 아니었으니까.
육아에서도 굉장히 냉정한 현실과 마주했는데,
아이와 대화를 깊이 그리고 자주 나누다보면,
아이와 엄마의 관계는 그야말로 '절대적' '무조건적' 관계임.
반면 나와 아이는 내가 '노오력'해야 아이가 나를 따르는 관계라는 거.
엄마는 무조건 좋은데, 아빠는 나한테 잘해주고 놀아주고 시간과 애정을 듬뿍 쏟은 만큼만 좋아해주는 기브 엔 테이크의 관계란 거 ㅋㅋㅋ
그 때문에 좀 서운하기도 한데, 걍 평생 노오력하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함 ㅎㅎㅎ
결혼하여 육아를 하는 남자들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이 은밀한 심리적 딜레마.
ㅅㅂ 나는 존나 왕자인데(이고 싶은데)
실제 나한테 주어진 가정에서의 실제 R&R은 '희생'과 '노오력'을 요하는 철저한 '지원업무'에 가깝네?
이거 적응하는데 대략 3년 걸린듯 ㅠㅠ
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달은 거임.
내가 더 이상 어린시절 그 왕자가 아니로구나!
역설적으로 아내의 출산 이후 나 또한 무언가를 낳고자 하는 창조의 욕구가 커지면서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
내가 주체로 사는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즉, 가정에서는 영원한 서포터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리더가 되고 이니시에이터가 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전환이 가능했던건 확실히 울 아부지가 전형적 가부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듯.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자랐고 가부장의 권위를 세우는 법을 배우지도 듣지도 행하지고 않으신 편임.
덕분에 나는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람(엄마는 무서웠음 ㅠㅠ).
아버지는 그래도 서포터로서의 역할을 '나름' 소화하려 노력하신 편이고 나 또한 그 영향을 많이 받음.
즉 가정 내에서 남자가 절대적 권위를 지닌 주체이고 리더이고 의사결정권자라기보다는 엄마와 아이를 최대한 물질적 심리적 정서적으로 돕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그래도 볼 수 있었다는 거.
가부장 면모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울 아부지.
아내와 자녀에 대한 심리적 지원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영역에선 최선을 다하셨고 그건 내가 누린 최고의 행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의 어린시절 디폴트였던 심리적 돌봄과 지원의 부족은 이후 두붐이 나와 동생을 키우는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고,
나는 그로 인해 심리상담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으니...
인생사는 참으로 되풀이되면서 조금씩 나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삶이 나에게 재현되지만 복사본은 아니다.
나는 그 경험을 다시 쓰는 중이다.
내 버전으로.
나는 아마도 남은 생 동안 가정 내에서 최대한 서포터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하겠지만
과연 미래에는 어떨까?
인공자궁 기술의 탄생으로 남자도 여자도 애를 낳지 않고 기르기만 하는 세계라면 그땐 또 남녀의 역할이 상황에 맞게 변할 것이다.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은 놀랍다.
쓰다보니 SF로 갔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