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세준 Jan 31. 2021

하틀랜드를 읽고

AD ASTRA PER ASPERA

� 하틀랜드

1. 보이지 않는 자들

이 책은 미디어에선 보이지 않는,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 계급, 그 안에서도 최하층에 해당하는 가난한 백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인종적 특혜 따위는 누려본 적 없고,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하고 복지 혜택을 받은 것을 두고, "그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구나"라고 말하는 이들. 그들의 마음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계급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없는 것으로 취급받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거잖니. 거기에서 수치심이 생겨. 중산층과 상류층의 서사가 가득한 곳에서는 가난하게 산다는 것에 깊은 수치를 느끼고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느낄 수 있어 (193p)

같은 백인들은 시골에 사는, 일찍 낳은 아이를 데리고 트레일러에 사는 가난한 백인 여성의 서사에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 안과 밖을 모두 경험한 사람. 


2 별에서 온 그녀

책 '하틀랜드heartland'의 무대는 미국 중부 캔자스Kansas 주(洲)입니다. 주의 모토는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Ad Astra per Aspera". 그러나 미국에서도 '날아서 지나는 땅flyover country' 취급을 받는 캔자수 주의 시골에서의 삶은 오직 역경 뿐입니다. 아메리칸 드림 따위, 닿진 않는 별에 불과합니다.

저자 세라 스마시Sarah Smarsh는 어린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고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처절한 노력 끝에 마침내 안정적인 집과 재정적 여유를 갖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나아간 모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겨우 도달한 별에서 내려 왔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슴의 땅', 그곳에서 삼대에 걸쳐 살아간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려 말이죠. 

빛나는 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도 다시 흙먼지 풀풀 날리는 캔자스로 돌아온 이유는?

2차선 도로에서 빠져나와 흙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달리면서 창문을 열고 땅 냄새와 공기 냄새를 맡았어. 우리 아빠, 우리 할아버지들이 나를 차에 태우고 소 먹이를 주거나 밀 이삭 낱알 수를 세러 갈 때에 똑같이 그렇게 하는 걸 봤거든 (398p).


3. 해원

저자는 자신의 상상 속의 자녀 어거스트August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친가와 외가 삼대에 걸친 가난과 폭력의 사슬을 끊습니다.

어머니와 조모가 반복했던, 가난한 집안 출신의 이른 임신과 출산의 경험을 사라 스마시는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소중해.'라고 그 목소리가 말했어. 내 목소리고 네 목소리였지... 나는 나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했기 때문에 네가 오직 내 마음 안에만 깃들도록 해야 했어. 내 안에 있는 여성에게는 좀 서글픈 일이었지만 네 안에 있는 신을 위해서는 잘한 일이었다(413p)

그렇게 저자는 어거스트 귀신을 성불(?) 시켰습니다. 쓰레기라 불리며 사회에서 멸시 당하던 가난한 백인 여성들이 쌓아 온 업장을 녹였습니다. 만약 내가 이 책을 번역했더라면 저자 소개에 반드시 한 줄을 넣었을 것입니다.  

세라 스마시는 캔자스 주가 낳은 큰 무당이다.
 

4. 가난은 증명이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오직 열심히 일해야만 비를 피할 집이 생기고 배를 채울 음식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웠어"라고 말하는 소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머니는 무한한 사랑을 공황기 아이들이 동전을 모으듯 가슴속에 꽁꽁 닫아놓고 풀어두지 않았어... 오직 엄마와 살을 대고 싶은 생각에 날마다 엄마 어깨를 주물러줬어(61p).

그저 존재만으로도 사랑과 축복의 대상이 되고 가족들에게 행복의 원천 노릇을 하는 유년기의 부재는 세라 스마시로 하여금 일찍 철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그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자란 사랑을 어느정도 채워주긴 했지만 충분하진 않았죠. 

세라 스마시는 이후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넌 평생 110퍼센트 애쓰며 살았으니까 지금부터는 70퍼센트만 해라."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노력의 대가로 그녀는 성공했습니다. 자신과 삼대의 삶을 모두 돌아볼 정도로 말이죠. 

분명 자신의 조부모, 부모와 달리 트레일러의 삶은 벗어났지만, 그녀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삶에서 온전히 벗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홈페이지를 따로 만들 정도로 저명한 저자가 된 그녀의 프로필 사진에선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농장의 소녀'가 보였거든요. 

그녀 역시 이런 결핍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플 정도로 덤덤하게 말이죠.

상황이 더 좋아지더라도, 혹은 더 좋아질 필요가 없다 하더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결핍감이 있어. 계급은 허상일 뿐이지만 실제적 영향을 미치는 허상이야 (406p)


5. Must read

책을 읽는 도중 오랜만에 공감각 경험을 했습니다. 저자 세라 스마시가 상세하게 묘사한 농장에서의 삶을 읽는 도중 흙냄새가 나더군요. 정말 살아있는 글을 만날 때 드물게 하는 경험이었는데 이번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개인, 가족 단위의 삶에서 '정치'는 '토네이도'처럼 예측불가능한 재앙에 가깝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나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그러했듯이 이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난의 구조를 직면하고 더 이상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게 도와준다는 점은 분명 희망으로 읽힙니다. 

대한민국 40대 아시안 남성과 미국의 40대 백인 여성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젠더, 인종, 계급의 간극이 놓여 있지만 이 책을 필독서로 모두에게 추천하는 바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토대인 땅, 그리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존엄을 지키며 세대와 세대를 건너 보다 나은 삶을 물려줬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자녀 머리에 손대지 마십시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