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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준 Mar 30. 2021

오늘의 일기

선거철 단상

1. 오세훈 후보 토론 장면 보고 깜놀했다. 피부는 여전히 좋은데 긴장을 저언혀 안했더라.  결과 그는 자신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노출했다. '왕자'.


2. 원래 왕자 캐릭터는 거지가 되어 밑바닥 한 번 세게 찍고 '거듭남'의 체험을 한 후 다시 상승해 원래의 지위를 되찾는다는 스토리텔링의 법칙을 따른다. fall and rise.


3. 근데 오세훈 후보 얼굴 보니까 바닥을 찍은 사람 특유의 그 겸허함이 저언혀 없더라. 그는 여전히 왕자였고 서울시장이라는 왕위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었다.


4. 결론적으로 오세훈 후보는 밑바닥을 아직 안 찍었더라. 왕자가 거지가 되었다가 다시 왕자가, 아니 왕이 되는 왕도royal road에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는게 내 소감이다.


5. 정치인으로서 가장 매력적인 스토리는 rise-fall-rise 패턴인데, 여기에서 그 끝에 fall이 하나 더 붙고 그 fall이 비극적 죽음이면 그는 신화가 된다.


6. 한국사에서 신화로 남은 대통령은 딱 두명 뿐이다.

박정희와 노무현. 이 둘 이후로, '신화는 없다'. 있어도 사소한 '리바이벌'일 뿐이다.


7. 대립되는 두 개의 신화는 이미 촛불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소멸의 수순에 접어 들었다. 이제 명실상부 인간의 시대다. 영웅에게 자신을 투사하던 낡은 청동거울은 묻어야 한다.


8. 신화가 사라진 자리, 시시한 군웅들의 시시한 이야기가 지겨운 분들에게는 웹소설을 권한다. 거기엔 여전히 영웅들의 서사가 살아 있으니까.


9. 하지만 정치에선 더 이상 영웅을 찾지 말길 바란다. 당신은 그를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고 떠받드는만큼 경멸하며 마침내 그를 대속자로 만들 것이다(사실상, 죽인다는 뜻이다).


10. 이상적인 리더에 대한 개인의 심리적 투사를 기반으로 한 집단의 역동은 여러모로 정치를 정념이 넘쳐흐르는 장으로 만든다. 그게 사람을 여럿 잡는다.


11. 자신의 트라우마, 콤플렉스, 그림자를 정치인에 대한 극도의 증오 혹은 집착을 통해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에 가까워질수록 증상도 커진다.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12.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흑화된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삼가했을 말과 행동이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서 나온다. 보고있자면 연민의 마음이 든다. 그들과 내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3. 선거는 스트레스 대환장 파티다. 다들 정신건강을 단디 챙겨야 한다. 긴장 안하고 나사 풀고 에라 모르겠다 아무말, 아무표정, 아무행동이나 하면 오세훈 후보처럼 된다는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한다.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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