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세준 Jul 28. 2016

가해자를 반드시 '용서'해야 하나요? No!

내일의 심리학 #8

    성적 학대를 경험한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주변의 지인들에게 털어놓을 때 위로와 조언이랍시고 듣는 말들 중 가장 최악이 바로 '이제 그만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최악의 말을 서슴없이 피해자의 면전에 대고 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종교인'이죠. 그들에게 용서란 교리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하는 도그마니까요. 


    '용서'를 강매한 무수한 사례들 중 정점을 찍은 이가 바로 법륜입니다. 즉문즉설에서 어린시절 나를 성폭행한 아버지에게 무려 108배 절을 하면서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라는 처방을 내렸다지요. 그게 그 사람이 내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며. 만약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이렇게 대꾸해줬을 겁니다. 


꺼져! 감히 어디서 약을 팔어!  


    용서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용서는 용기를 내어 치유의 길을 걸어가면서 가해자와 분리되어 자신의 몸과 마음의 경계를 건강하게 다시 세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 비로서 가능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용서가 치유를 낳는 것이 아니라, 치유가 용서를 낳습니다. 


    한국 사회도 '영원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깨고 자신을 신체적, 정서적, 성적, 영적으로 학대한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와 연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폭력으로부터 지키고 치유의 과정을 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용서는 그 치유의 과정에서 나오는 작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명령에 의한 것이어선 안됩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 의한 용서는 그야말로 최악입니다. 그런 식의 압력행사 자체가 범죄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멋모르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니가 그렇게 괴로우니 이제 그만 그를 용서하면 안되겠니?'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내는게 사실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용서란 무엇인가? 치유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된 진정한 용서에 관한 글이 있어 번역해서 올립니다. 긴 글 읽기 힘든 분들에게 딱 세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분노를 용서로 덮지 마세요. 분노가 마땅히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향해야 함을 잊지 마세요

둘. 가해자가 여전히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거리를 두세요. 건강한 경계를 두는 것은 필수입니다. 

셋. 잊으려하지 마세요. 용서는 자신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과정입니다. 과거를 직면하면 할수록 달라붙어 있던 부정적 정서들은 희미해집니다. 


이 글이 성적 학대 혹은 다른 모든 종류의 학대 경험으로 인해 가뜩이나 힘든데 용서하라는 말 때문에 더 힘들었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용서하는 건 어때 What About Forgiveness?


글쓴이 Christina Enevoldsen

역자: 오세준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을 때부터, 나는 어린 시절에 겪은 성적 학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를 학대한 게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넌 그를 용서했니?" 나는 용서가 의무인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음이 두려웠다. 학대로 인해 나는 계속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나는 많은 것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두려웠는데, 그 중에서도 버려질 것이 가장 두려웠다. 만약 내가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나는 내 기독교인 친구들에 의해,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신에 의해 비난받고 거부당할 것 같았다. 내가 신의 현존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채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 않는 한, 나는 용서해야만 했다. 용서하지않음은, 결국, 내게 저질러진 일보다 훨씬 나쁜 일이었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나를 학대한 사람보다 나를 더욱 나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땐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또한 용서가 "그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은 척 하기"와 동의어라고 생각했다. 용서에 대한 나의 정의에 따르면, 내 아버지는 어떠한 결과도 감당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선 안되었다. 설령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버지를 언급할 순 없었다. 그것은 결국 그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일 것이고 안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용서는 또한 내가 아버지를 향해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느껴선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이전과 같은 상태로 계속 유지될 것을 의미하였다. 


    비단 종교적 압력이 아니더라도, 난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고 싶진 않았다. 그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것 만큼이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용서라는 가면을 쓴 채, 내 느낌을 틀어막고 멋진 미소를 억지로 띠고 있었다. 용서를 했을 때, 나는 과거를 뒤에 두어야만 했고 내 느낌들을 부정했었다. 용서가 치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길래, 난 내가 치유된 것처럼 행동했다. 내 분노를 깊숙한 어딘가, 결코 찾을 수 없을 어딘가에 묻어두었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묻혀 있었다. 산 채로 묻혀 있었다. 그것은 할퀴고 쥐어뜯으며 비명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걸 내 자신을 향한 학대적 행동으로 표출했다. 난 위험한 성적 행동, 자해, 학대적 관계맺기 같은 온갖 종류의 파괴적 행동을 통해 내 자신을 계속 학대했다. 


    결국, 난 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었다. 난 분노가 내가 어린 시절 괴롭게 겪은 유형의 일들로부터 날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내가 통제감과 보다 큰 힘을 지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분노를 내뿜었을 때, 나는 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사람들, 특히 몇몇 남자들이 나에게 위협당했을 때, 난 속으로는 몰래 웃고 있었다. 만약 내가 분노를 뿜어내면, 그들이 내가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날 보호해주진 못했다. 난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해서 상처를 받고 말았다. 


    난 행복하지 않았다. 분노는 내가 쓴 마스크였고, 진짜 내가 아니었다. 진정한 나를 느끼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정한 나의 모습, 친절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침내 나를 압박하던 분노를 제거하기 위하여, 난 그것을 밖으로 꺼내 다루어야만 했다. 난 그 근원을 직면해야만 했고 그와 관련된 모든 고통을 보아야만 했다. 난 내 분노의 진실한 타겟이 내가 아니라, 바로 나의 부모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때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그를 보호하려 했던 엄마에게 더 크게 화가 났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그때까지도 내 부모들은 자신들의 학대적인 태도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난 그러한 병든 패턴을 지속하길 거부하였고, 결국 경계선을 세우고(그들은 경계선을 존중하길 거부하였다), 그들과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난 화해를 포함하지 않는 용서라는, 용서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 가슴 속에서, 용서는 여전히 일종의 위협이었다. 혹자는 내가 부모들을 용서했다고 주장했지만 난 마치 그 사람이 날 긴 손톱에, 날카로운 이빨에, 샛노란 눈동자에 털이 긴 짐승 한 마리와 함께 우리에 가둬두는 것처럼 반응했다. 내 마음 속에서, 용서란 날 무장해제하고 학대에 더욱 취약하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혹은 보여주기 식의 용서에 대한 부담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결국 나에게 용서라는 허울은 날아갔으며 난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난 내 느낌들을 덮어버리는 대신 그것들을 계속 밖으로 끄집어 내어 정리해 나아갔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분노, 두려움과 고통에 대해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몇 달의 몇 달을 거친 작업을 거치고 나니, 문득 정말로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용서하고 싶어졌다. 난 충격을 받았다. 그 날 이전엔, 내가 용서를 할 수 있으리란 느낌을 조금도 받지 못했었다. 갑자기, 난 공격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 


    일단 그러한 결정을 내리자, 나는 이전보다 마음이 가벼워졌고, 자유로워졌다. 난 이토록 큰 차이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용서가 나의 고통의 끝을 의미하진 않았다. 실제로, 일단 그들을 용서하려 들자, 난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가장 강력한 고통을 느꼈었다. 용서는 나의 가슴을 그들에 대한 자비와 이해를 향해 열어놓았으며(그들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그들을 보다 균형잡힌 방식으로 보게 하였다. 분노와 증오 속에서, 난 오직 그들을 갱생의 여지가 없는 사악한 인간들로만 보았었다. 그 누구도 선하지만도, 사악하지만도 않지만, 난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오직 사악할 뿐이라는 거짓말을 이용했다. 일단 나의 부모가 실제로도 좋은 면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자, 난 그들이 너무나도 그립기 시작했다. 난 정말 엄마를 원했다! 이것은 진실을 찾는 여정이었기에, 그 진실이 심지어 고통을 안겨주더라도,결국엔 치유를 가져올 것이기에, 난 그 진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난 아직까지도 부모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리고 결코 그럴 의도도 없다. 물리적으로도 거리를 두고, 관계적으로도 거리를 두었건만, 그들은 학대를 지속했다. 떼때로, 과거로부터 더욱 많은 것들이 조명을 받게 되었으며 난 계속해서 열심히 나의 느낌들을 밖으로 꺼내 정리해 나아갔다. 나의 용서는 겹겹이 진행되는 과정이었다. 난 이제 내 부모님들에 대해 더 이상 고통이라는 측면에서도, 갈망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다지 마음쓰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그들은 머나먼 기억이며 시간이 지나가고 나의 과거를 계속 직면할 수록 더욱 그렇게 멀어지고 있다. 난 그들이 한 짓을, 혹은 하려 했던 짓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룬 기억들에는 더 이상 고통이 달라붙어 있지 않다.

    이제 난 그들을 향해 더 이상 세찬 감정도, 복수심도 지니고 있지 않다. 난 분노와 공격심으로부터 멀어졌으며 그들의 운명을 조종하고 싶고, "당해도 싸다"고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 놓았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용서이다. 


    난 나에게 용서를 팔려고 든 사람들이 나를 상처입히려고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들은 나를 도우려고 한 것이고 자신들이 지닌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그들은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로웠다. 용서는 개인적인 이슈이며 학대 문제를 다룰 땐 가장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치유 과정의 산물이었지, 그 수단이 아니었다. 

작가의 이전글 우울? 불안? 나가서 포켓몬고를 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