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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5. 2024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


1.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처음엔, 삶은 공평하나 생활은 불공평한 것인지도,라고 썼으나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거짓말처럼 보였다. 삶이란, 아니 인간이란, 세상이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요소들의 합인 것이 분명하다. ‘왜’라는 질문에 관한 해답은 적어도 인간에겐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삶이란, 그리고 생활이란 가끔씩 난데없이 날아오는 컴퓨터의 메시지처럼 ‘치명적인, 혹은 알 수 없는 오류의 집합체'라고 쓴다.


한결 편안해진 삶이다. 

될 대로 되라지. 뭐가 두려운가.

삶이란 그런 것인데.



 2. ON / OFF


그때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오후였다. 멀리서 뛰어오는 아이들의 미소가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느껴지는, 그런 포근하고 나른한 정오의 한 때였다.


어쩌면 나는 OFF 된 라디오 같았다. 전원이 꺼지고 플러그마저 뽑힌 채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알았다. 언젠가 아주 천천히 ON이 되어버릴 거라는 거. 결국에 ON / OFF의 전환은 반복되고야 만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느 쪽이 ON이고 OFF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지나간, 과거를 나는 적기 시작했다. 너무 당연하지만 현재이던 것은 과거가 된다. 나는 그것이 너무 이상하고, 그 물리적 비밀을 잘 모르겠다. 지나간다는 것은, 시간이 앞으로만 달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사실이며, 또한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아무튼 간에, 그 당시의 내 생각에는, 현재란 대체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것이 과거가 되고 나면 진행 중인 시간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은 매번 그 시점보다 선명한 느낌으로, 또 다른 지금을 향해 달려왔다.



  3. 그리고 얼마 전


심하게 앓고 난 뒤의 일이다. 초여름 무렵의 수요일 오후였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농구공과 점퍼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운동장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 봄 햇살이 쏟아졌다. 재건축이라는 명목으로 부서지고 파헤쳐지는 낡고 오래된 건물의 반대편엔, 느린 오후처럼 장독대에 홀로 걸터앉은 어느 할머니의 모습이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는 햇살을 먹으면 행복해진다고 했지만, 나는 햇살 아래의 메마른 풍경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쓸쓸함에 가슴이 먹먹했다. 허름한 연립주택과 말을 잃은 할머니에게서 나는 삶의 냉정한 현재와 두려운 미래라는 두 형제를 감지하고야 말았다. 왜 세상은 끝까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끝에 초라하게 죽어갈 운명을 인간에게 무책임하게 전가하는가. 도무지 ‘까닭 모를 삶’에 대한 원망에, 하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대답이 없는 물음표 하나. 결국 그것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그것을 삶의 공평함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다.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기껏해야 폼 잡는 일에 불과하다. 그저 나는 그때 삶이란 참 슬픈 거로구나, 하고 느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에 운동장으로 뛰어가던 내가 살풍경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새 아무도 곁에 없는 늙어버린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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