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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5. 2024

자갈밭을 서성이다 (1)

  1. Ring, Ring


  벨이 울리면 드라마가 시작된다.


  “극장 서브마린 시네마입니다. 원서 넣으셨죠? 1차 서류심사 통과하셨습니다. 축하드리고요, 이번 주 토요일, 그러니까 20일 오전 10시 30분까지 5층에 극장사업부로 오시면 됩니다.”


  “아아, 예, 예.”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제조가 덜 된 단음절의 말들.

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거기 강남에 있는 거 맞죠?”


  이런. 결코 적절한 질문이 아니었지만 말은 이미 입을 떠난 뒤였다.


   “예. 보통 줄여서 서브라고 하죠. 지하철역에서 나오셔서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낯선 상황이기 때문일까.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토요일까지는 이틀 남았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나는 다니던 직장을 고스란히 두 번이나 뛰쳐나왔다. 출근 버스에서 오르면 언제나 머릿속은 흐리멍덩했다. 그런 느낌이 싫었다. 이게 아니야,라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다 나는 기어이 일어났다. 뭔가 다른,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나는 선뜻 대답할 것이 없었다. 다만 어렴풋하게나마 머릿속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객석에 앉을 때면 마음이 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주 영화잡지를 뒤적이던 나는 극장직원을 뽑는다는 구인광고에 형광펜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월급까지 받는다니 이거야말로 판타지야. 물론 극장도 여덟 시간 동안, 아니 그 이상 내내 묶여있는 직장이란 곳이 되고 나면 성가시고 달갑지 않은 일들이 따라다니기 마련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난 2년보다는 낫겠지. 나는 뭔가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음을 통보받았다.


  그런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거기 강남에 있는 거 맞죠, 라니.

  세상에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 또 어디 있담.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인 바로 서브인데, 그것도 거기에서 일하겠다고 지원한 사람이 그 극장이 거기 있는 거 맞느냐고 묻다니 그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도대체 그런 질문은 내 머리의 어디서 생성된 것일까.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면 몰라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왜 나는 확인하려 들었던 걸까. 전화의 상대방인 사람이 나였더라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을 텐데.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정말로 그렇게 말해도 싸지. 아니 그 말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는 스스로도 정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경망함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변명으로도, 아니 그보다도 변명이 있다면 더 우스운 꼴이었다. 무슨 이유로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바보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별 사건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의 염려와는 달리,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건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사건이란 말을 붙일 수도 없는, 기억조차 스쳐가지도 않는 무의미한 해프닝쯤일 수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아무 일도 아니었을.


  대체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기억이란 것은, 그리고 말이라는 것은 필경 죽고 마는 것일 테니. 혹 누군가의 기억창고에 저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그런 기억은 기껏해야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소심했다.




  2. SPY


  그날 저녁 나는 서브극장에 이른바 염탐을 하러 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극장에서 본 영화들의 목록은 꼽을 수 있어도, 그 극장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좀처럼 떠오르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2년 전부터는 그 극장에 가 본 기억이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의 들뜬 분위기에, 도무지 나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이유였다. 서브는 요컨대 잘 나가는 극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매표소에서 '마가린 특급'이라는 영화를 골랐다. 가장 시시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영화였다. 나는 영화보다는 극장을 구경해야 할 목적이었다. 예상대로 영화는 지루했다. 관객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맨 앞자리에 앉은 요란한 연인들 덕분에 나는 자막조차 읽기 힘들었지만, 그 또한 원하던 바였다. 대신에 나는 영화 대신 극장을 보았다.


  토요일에 첫 번째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은 적어도 50명은 되어 보였다. 한 명을 뽑는다면서, 더군다나 1차 서류심사까지 거쳤다는 게 사실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루한 한참을 기다린 뒤, 신상명세에 대한 확인질문이 있는 동안 나는 자신이 도마 위에 오른 생선 꼴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퍼런 칼날이 눈앞인데, 그 앞에서 펄떡거리는 꼬락서니라니.


  “대학을 졸업하신 지가 꽤 되셨군요. 그동안 뭘 하셨어요?”

  나는 이력서에 대학 입학과 졸업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꽤나 많은 생각을 했다. 적당히 놀고먹었는데. 그 사이에 두 번이나 직장을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그런데 나는 또 왜 그런 이야기를 당당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스스로가 느끼기에 몰염치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때에 내 머릿속에 누군가의 퍼덕거리는 말.

  젠장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 없으려나.


   “그게 저…”


   그것이 내 대답의 전부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나는 멍청한 표정이었다. 면접을 마치고 나왔을 때 면접비용을 대신한다며 직원에게 받은 것은, 며칠 전 이 극장에서 본 ‘마가린 특급’ 초대권이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초대권은 폭락한 주식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거리로 나온 나는 다시는 서브에 올 일이 없을 거란 당연한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 월요일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서브마린 시네마입니다.


  “2차 면접에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리고요, 내일 11시에 최종 면접입니다.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나는 인터뷰 내내 계속 짧은 대답을 했지만, 마지막에 누군가 극장 서브에서 본 영화를 대라고 했을 때 6개관의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전 단관 상영 당시의 영화들의 목록을 꽤나 길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면접은 단체면접이었다. 여덟 명쯤 되는 지원자들이 회의실의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젠 신선한 생선을 고르겠다는 심사로군. 나는 여전히 비틀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리를 꼬고 앉아 심드렁하게 팔짱을 낀 사람은 나뿐이었다. 긴장한 지원자들 사이의 어색한 침묵의 한참 뒤에 이번에는 얼굴에 두꺼운 기름기가 잔뜩 흐르는 극장사장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여기서 살아남고 싶으면 니들 내 앞에서 한 번 발버둥이라도 쳐봐라, 아무리 봐도 그런 표정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다리를 풀지 않았다.


  회의실 구석구석에 자리한 잘난 대학교들의 감사패를 배경으로 면접은 시작되었다. 극장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라. 질문은 시시했다. 그런 것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이른바 기출문제였다.

  탁아소나 놀이방을 만들어서 주부들을 극장으로 이끌어내야 합니다. 게임방을 만들어서 젊은 관객들을 늘이는 것은 어떨까요. 극장로비 한쪽에 품위 있는 레스토랑을 만드는 겁니다, 근사한 저녁 식사와 영화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요. 팝콘 자판기를 만들면 어떨까요, 부수입을 생각해야죠. 지원자들은 사냥꾼이 던져준 손쉬운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젠장, 가관이로군. 시끄러운 아이들과 쾅쾅거리는 오락실의 소음, 거기다 느끼한 팝콘 냄새도 부족해 돈가스 소스냄새가 폴폴 나는 극장이라니. 오, 그곳은 진정 당신들만의 시네마 천국이겠지요.


  비틀리기로 작정한 나는 같은 생선 주제에 그들을 비웃기 시작했다. 정말 어이가 없군. 장식이나  액세서리는 언젠간 내던져지고 마는 거 아닌가. 그것들은 결국엔 시간이 지나면 싫증 나기 마련이고, 마지막으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쓰레기통에서 그것들은 죽어가고 말 걸. 중요한 건 정말로 아주 단순한 게 아니던가. 이를테면 본질 말이야. 원래의 기능, 핵심적인 성질의 것. 심플한 것 말이야.


  지금 다들 진심이야?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아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니. 그냥 하나의 단순한 본질만 수행하면 안 되는 건가. 단순한 거, 나라도 그걸 잊지 않겠어. 나는 절대로 그걸 잊고 살 수는 없어. 어느새 내 차례였다.


  “저라면 6관 스크린 앞의 좌석 두 줄을 과감하게 드러내겠습니다. 뒷좌석에선 그거 때문에 시야확보가 전혀 안 되더군요. 스크린 아래 부분이 가려진 영화를 보는 건 별로던데. 극장은 관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보게 도와줄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요? 아, 그리고 단관일 때처럼 하나쯤은 아주 큰 스크린이 있는 상영관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요. 극장에선 영화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러 왔으니까요.”


  누가 훔쳐보기라도 할까 봐 손으로 절반쯤 가려가며 채점표를 비밀스럽게 작성하고 있는 사장의 얼굴 표정이 잠시 굳어진다. 이 놈이 제정신인가, 그의 머릿속의 말들이 들리는 거 같다. 순간 나를 향한 질문이 날아온다.


  “자넨 여기 왜 지원했나?”


  “저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럼 매일 여기서 영화만 보고, 일은 안 할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 이거지.


  두 번의 인터뷰였다. 우스꽝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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