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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7. 2024

자갈밭을 서성이다 (2)

  3. 미션 임파서블


   더 이상 벨은 울리지 않았다.

   며칠 뒤에 나는 노란색 봉투에 잠수함 로그와 서브마린 시네마라고 큼직하게 적힌 우편물을 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간략하고 명쾌한 통보야말로 서브에 관련된 일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맘에 드는 일이었다.


   ‘함께 일할 수 없어 아쉽게 생각합니다. 다음에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그들이 원하는 자,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자. 심하게 말하자면, 지금 여기의 세상의 논리는 철저하게 사람을 취업자와 무직자로 나누어 놓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 기묘한 논리에 불평하여 투정이나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동조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세상의 모든 규칙은 신성하지 않으며, 타인과 구태여 원하지 않는 경쟁을 벌일 필요도 없으며, 스스로를 누군가들의 입맛에 맞게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인형으로 개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이후로도 많은 것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과 고집에 대한 적절한 영수증으로 나는 그들과의 게임에서 퇴장해야만 했다.


    몇 달 뒤에 나는 아는 선배의 소개로 영화 관련 웹 사이트의 콘텐츠 작가 모집의 최종면접까지 끝내고, 마지막 절차상 그 회사의 젊은 사장과 마주했다. 팀장이란 사람은 내일부터 같이 일할 작가라고 나를 사장에게 소개하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사장은 제법 이 쪽에선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를 소개한 선배가 해준 말에 의하면, 그는 평소에 보디가드 두 명을 데리고 다니고, 부모를 잘 둔 덕에 극장을 하나 경영하고 있으며 유명 여배우와의 염문설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요즘 제일 잘 팔리는 영화잡지 알죠? 난 항상 거기가 부러웠어요. 거기처럼 우리도 매주 특집기사를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죠?"


  젠장, 기껏 작가 한 명을 뽑으면서 수십 명의 기자로 무장한 영화전문 잡지사를 닮으려 하다니 너무하는군.


  나는 기어이 말했다.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무조건 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예스맨이 싫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말뿐이다. 지지리도 느리게 일을 끌면서 말로는 대단한 척하는 재수 없는 족속들. 나는 할 수 있어요. 나는 할 수 있어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도대체 뭐가 다른가.


    예상대로, 다음 날 나는 아무런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 거부의사마저도 그들에게 시간낭비였던 것이다. 그들에겐 목을 맨 다른 지원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결국 나는 스스로에게 대답한 셈이었다. 현실적인 임무수행의 불가.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선택받는 입장은 어느 상황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일은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 결론이 결코 끝이나 등급판정 따위는 아니었다.


    행여 누군가의 거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추락이 아니고, 일방적인 거래가 아니라 양자 간의 선택의 문제였다. 어떤 교환이나 대가로서 자신의 꿈을, 의지를 버릴 필요는 없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행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마치 낙오자를 쳐다보는 듯한 동정 어린 눈길에 신경을 쓰면서 살지는 않겠다. 누군가의 낙인에 인해 절망하거나 스스로를 아주 하찮은 존재로 깎아내리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홀로 자기만의 깃발을 지키고 있었노라고 뻐기는 건 더더욱 싫다.


   나는 그저, 조금 까다롭거나 소심할 따름이었다.




  4. 남의 아내가 된 여자 


  사실이거나, 혹은 사실이 아닌 것들.


  "그때 그렇게 바보처럼 헤어지지 않았다면

    우린 결혼했을까?"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는 첫사랑은 내 질문에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의 질문을 접어놓은 그녀는 정면을 주시한 채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라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길게 바라보았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그녀의 표정은 세월이 변해도 그대로였다. 그녀의 미간에 미세한 움직임뿐이었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아까 우리 길을 잘못 들어서 자갈길에서 덜컹거렸잖아. 난 그런 게 정말 싫어. 길을 달려도 시원하게 뻗어있는 대로를 질주하고 싶어. 우리가 그때 다시 시작했더라도, 결국엔 헤어졌을 거야. 난 너의 평탄하지 않은 길을 같이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 맞아. 네가 옳아."


  그것이 우리가 헤어진, 혹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너의 선택이 옳았어.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사랑했다.

  다만 너무 다른 길에 있었다.


  결국에.

  나는 계속해서 자갈밭에서 서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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