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 《관객모독》

친구의 소식에 부쳐

by 세포뭉치

친구야 기억하니, 세상은 수많은 거짓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던 나의 말을. 그때 내가 보기에 세상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방에서 화내고 소리 지르기에 여념이 없어보였어. 몇몇 용기 내어 탈출구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도 이내 거짓말처럼 다시 같은 문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곤 했었지.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내 말을 들은 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거짓들 안에 모종의 진실은 있지 않냐며 항변했었지. 그러자 이번엔 내 쪽에서 고개를 끄덕였어. 가령 우리가 백록담 같은 호수를 보겠다며 충동적으로 올랐던 금오름의 정상에서 봤던 풍경들, 거기엔 적어도 일말의 진실이 있었지. 화구의 가장자리가 번잡한 세상을 도려내니 아주 잠시 동안은 정말로 본다는 게 가능했었던 것 같아. 돌이켜보면 우리를 반겨주었던 건 우리가 기대했던 호수가 아니라 웅덩이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런 객관일랑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버려도 좋은 것이니까.

다만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건 그 말을 하는 너의 눈동자였지. 주말 저녁이면 술 한 잔에도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촉촉하게 젖어오던 그 동그란 눈동자. 왜냐고 물으면 “월요일에 출근하니까.” 그 말을 듣곤 낄낄거리며 얼굴을 건너다보는데 내 웃음소리 너머의 네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나는 별 수 없이 슬퍼졌어. 말이 없어진 우리는 씁쓰름한 이야기의 뒷맛을 지우려는 듯 자꾸만 입속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넣었지. 동화처럼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과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테이블들. 그 사이에서 핑크빛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혼신의 힘을 다해 스쿱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올렸고, 쏟아질듯 용기 밖으로 둥글게 튀어나온 아이스크림 바구니를 보고 우린 제법 행복했지. 그러니까 그 모기업이 잊을 수도 없게 자주 노동자를 죽이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야. 소박한 우리가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살 수 있도록 조금만 노력해주면 안 되었던 걸까, 그 집을 지나갈 때마다 작은 원망을 던져보곤 해.


어쩌면 네가 했던 말처럼 우리 인간들이 회사에서 벌이는 일들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일지도 몰라. 메소드 연기에 심취한 나머지 위계와 권력체제를 유일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 몇몇 사람들과 그 아래에서 웃는 눈과 우는 입으로 박수치는 물개들이 출연하는 부조리극 말이야. 왜, 동물들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것을 소리 내어 표현하면 ‘운다’고 하잖아. 그런 게 꼭 우리 사정에 맞는 것 같아.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그렇지. 이 부조리극의 기승전결을 익히는 걸 ‘사회생활’이라고 하는 데서는 뭐랄까, 아무래도 웃어야겠지? ‘사회’라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고 모이지 못하는 곳에서는. 별 수 없이 상연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익숙해질까? 무대 위에 오를 때 심호흡을 하지 않아도 괜찮게 될까?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장난에 익숙해진다는 게 왠지 모르게 두렵다.


몇 주 전엔 너의 또 다른 오랜 친구를 소개시켜 줬었지? 그때 내가 너무 주책없이 떠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분이 이미 친한 사람처럼 느껴졌는 걸. 사람을 깊이, 오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너의 사소한 습관을 매력 포인트로 꼽는 사람을 어떻게 가까이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삶의 희박한 진실이 세치 혀끝에 올라간 말들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서로를 향해있던 그 자세에 있는 거라면 두 사람 간의 관계는 확실히 진실일 거야. 그런 의미에서 카톡으로 별안간 툭, 하고 전해온 두 사람의 소식을 기쁘게 생각해.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결結이 삶의 결을 해치지 않고 행해질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오랫동안 너와 서로 환영하고 환영받아온 또 다른 사람으로서, 드물게 웃는 눈과 웃는 입으로 박수를 보내본다.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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