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by 세포뭉치

1.

당구를 치면 괴상한 단어를 많이 배우게 된다. 이를테면 우라(뒤돌려치기), 빵꾸(뱅크샷), 오시(밀어치기) 등등. 이 단어들은 일본어의 한국식 발음이나 일본식 영어의 한국식 발음같은 복잡한 출신 성분을 지니고 있어 처음 당구를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종종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어떤 언어라도 그렇듯, 이 누더기같은 말들도 자꾸 쓰다보면 부지불식간 정감이 들고 입에 붙는다. 그 중에 내가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말은 바로 ‘후루꾸’다. 후루꾸란 당구에서 요행으로 득점을 하게 된 상황을 말한다. 후루꾸는 재밌다. 그 말이 'fluke'의 일본식 발음을 한국어로 옮긴, 3개 국어 합작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물론이고 그 말이 가리키는 현상의 측면에서도 말이다.

당구 플레이어는 후루꾸 상황에서 요행으로 득점한 데에 대해 상대 선수에게 사과의 뜻으로 가벼운 목례를 건넨다. 그런데 여기서 ‘요행’이란 대체 무엇인가? 큐를 내지를 때에 갑자기 태풍이라도 불었다는 것일까? 주사위를 던져 6이 나오면 득점한 것으로 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실제로 일어난 일은 플레이어가 당구공의 어딘가를 가격했고 그 당구공이 물리법칙에 따라 다른 공에 부딪혀 득점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치는 사람의 의도와 그 결과는 인과관계가 없다. 치는 사람의 근육과 뼈의 움직임, 큐가 공에 맞닿을 때의 임팩트, 당구대의 천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는 둥근 공이 있을 따름이다. 예상치 못한 경로로 득점을 하고 멈춰있는 당구공은 치는 사람의 ‘예절’이나 그 상대의 허탈함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우리가 볼 수 없는 뒤편에서 고개를 돌린 채 비소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2.

세상에는 별별 이슈가 많다. 전 대통령은 다시 감옥으로 갔고 비트코인은 전고점을 돌파했다. 또 어떤 유명인은 사고를 쳤고 설익은 사과를 건네 대중들의 화를 부추겼다. 스크롤, 스크롤, 침대에 누운 채로 엄지를 까딱거린다. 요즘엔 무슨 갈등이 또 유행이다. 이 편에 서서 화를 내고, 저 편에 서서 욕을 했다가 뒤로 가기를 누르면서 잊는다. 정신이 멍해질 때까지 이슈들을 머릿속에 구겨 넣기가 일쑤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지, 생각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면 별안간에 허망해진다.

누운 채로 썩어가지 않고 청소라도 하기로 결심한 날은 내가 조금 기특하다. 약간의 비장함과 낡은 청소도구를 가지고 출정에 나선다. 퇴근길, 3층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꿉꿉한 냄새가 오늘의 타깃이다. 숙련된 후각 레이더가 화장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원흉을 발견한다. 손 닿지 않는 구석 까맣게 피어있는 곰팡이다. 그런데 이건 뭘까. 추적 끝에 맞닥뜨린 적에게 묘한 친밀감이 든다. 내가 모르는 시간에 집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자라나 어느새 존재감을 발산하게 되었다니. 내가 침대에 누워 나와 관계없는 소식들로 권태와 분투할 때 화장실 구석에서 차근차근 새로운 영역을 밟아가던 녀석을 생각한다. 뜻밖의 동거가 싫지만은 않다. 어쩐지 덜 외로운 느낌이 드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월세를 분담하지 않는 녀석과 함께하긴 어려울 것 같다. 거품형 락스를 ‘찍’하고 뿌린다.


3.

세상의 번잡함을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 그것의 디테일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에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종 내 몸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 손등을 보자. 그을린 손등을 지긋이 바라보면 점점이 모공과 제각각의 길이를 가진 털들이 보인다. 그 사이로 가로지는 주름과 건포도처럼 박혀있는 점도. 그 밑으로는 수많은 세포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웃든 울든 개의치 않고 분열과 사멸을 반복하며 그들의 삶에 분투하는 존재들이. 놀랍지도 않게 우리의 모든 의지에 반하는 심장이 1분에도 수십 번씩 혈관을 통해 그들에게 영양분을 날라주고 있다. 내 생명의 뿌리가 되는 기관들은 명목상 나의 몸임에도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저 제 일을 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의지 밖의 사물들이 촘촘히 관계하고 있는 결과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다. 그렇다면 내가 나라는 말은 명실이 상부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나를 나 아닌 것에 내맡긴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이미 주어가 빠진 채로 진행된다.

비로소 번잡함이 걷히고 무언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런저런 시끄러운 말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는 오직 이때뿐이다. 사랑한다는 것도 이런 내맡김과 다르지 않다.


4.

사물은 말이 없다. 그들은 꼭 그런 식으로만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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