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 『어떤 무작위의 세계』

by 세포뭉치

쇼츠를 보니 요즘은 ‘테토’, ‘에겐’을 성별의 접두어로 사용하는 게 유행인 것 같다. 이를테면 ‘테토남’, ‘에겐남’하는 식인데, 테토남은 카톡 프사를 신경쓰지 않아 늘 기본 프사를 유지하고 에겐남은 정성들여 찍은 셀카 한무더기를 올려둔단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분류가 유행하는 것이 매우 유감이다. 소위 남성성이라고 하는 것과 소위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투박하게 개념화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양적인 문제에 가깝다. 알다시피 우리 민족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2분법(성별)에서 4분법(혈액형)을 거쳐 16분법(MBTI)으로 진보해왔다. 기본적으로 분류를 신뢰하지 않는 나조차 16분법이 도래했을 때에는 꽤 감탄했었다. 그래도 사회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구나, 만약 256분법의 시대가 온다면 나조차 믿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 고작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사분법으로 회귀하다니? 이건 틀림없는 퇴행이야. 그러는 와중에 뇌의 한편에서는 그동안 내 프사는 어때왔는지에 대한 연산을 시행한다. 연산 결과: 내 프사는 적어도 10년 이상 파란 배경에 회색 대머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주책없이 조금 기쁘다. 그런데 테스토스테론이 좋은 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자꾸 넓어지는 것 같은 이마와 사소한 승부에 집착하는 구차한 수컷의 습성을 잠깐 떠올려본다. 역시 이런 식의 분류는 옳지 않다는 결론이다. 다음 쇼츠로 넘어간다. 그리고 또 다음으로. 그러는 사이에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초여름 땡볕에 달궈진 방안이 서서히 식어가면 나는 오늘도 책을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코 떠오른다. 내 자신이 조금 한심해진다. 이렇게 자신이 한심해질 때엔 대중에 널리 알려진 처방, ‘새로운 쇼츠’를 사용하면 된다. 다음 영상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생각이 그 전의 생각들을 말끔히 쓸어가기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죄책감을 미룰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나 성공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생각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령 ‘생각한다는 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마약이 아닐까.’하는 생각 같은 것. 나는 여기에 그럴 듯한 이유도 두 가지나 만들어 붙였다. 첫째, 재밌다. 여러분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았을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라. 아니면 며칠 전 알코올을 두개골 끝까지 채웠을 때를. 그런 때에 아무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입 밖으로 던지는 일만큼 재밌는 일이 또 없다. 나는 이것보다 순수하게 재밌는 일을 여태까지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이다. 안다. 누군가는 이 일이 전적으로 무용하다고 지적하며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세상에는 진정으로 무용함으로써만 유용함을 가지는 일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무용한 헛소리들은, 유용하고 현실적으로 가치 있으며 그래서 하등한 것들을 마음껏 비웃어주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말이 된다는 것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으며 그래서 지루하다는 이야기에 가깝기도 하다. 특히 어떤 감상을 이야기할 때는 깔끔하고 유용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흥미로운 것에서 점점 벗어나게 된다. 꼭 그런 이유로 나는 누군가에게 쉽게, 즉각적으로 감상을 말할 것을 요구받으면 종종 화가 나서 상대를 노려보고 싶은 심정이 되곤 한다. 물론 그런 기분이 되어도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분한 마음을 안고 최선을 다해 표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를 상대가 들었을 때 상대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라면 조금 즐거워진다. 단지 심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상대가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만 비로소 내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믿는다. 반대로 상대가 단번에 이해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네가 뭘 알아!”하고 소리 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른이 됐다는 건 제법 괜찮을 때도 있는 게 틀림없다.


생각이 마약인 또 다른 이유는 자의로 멈출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적어도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처님이 아니라면 말이다. 쇼츠를 넘기던 몇 시간 전에도, 어쩔 수 없이 모니터 앞으로 끌려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지금도 생각은 무시로 내 머릿속을 넘나든다. 문제는 이 불청객이 나의 감각과 행동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기타 연주를 해본 적이 있는가? 연주를 하는 도중 ‘다음 코드는 무엇이지? 왼손 약지를 이렇게...’라고 생각하는 순간 손가락이 굳는다. 다른 예시를 들어도 비슷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주행 중 왼쪽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의 협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그 사람의 다음 기억은 응급실의 낯선 천장이 될 것이다. 나는 이와 유사한 사례를 하루 종일도 만들 수 있다. 가령 포옹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두 팔을 벌리고 포옹에 들어가려는 순간 옷에 밴 땀 냄새가 걱정된다면? 어제 저녁 피자를 잔뜩 먹고 생긴 오른 턱의 뾰루지가 의식된다면? 그러면 그 행위를 포옹이 아니라 몸통박치기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적확한 언어사용이 될 것이다. 생각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들 어떻게 입에 풀칠은 하고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상당 부분 생각의 덕이라는 걸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너무 많은 생각은 좋지 않다. 지나치게 생각을 거듭하는 사람은 그 생각에 갇히게 된다. 생각은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상황에서 분리시키며,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 상관이 없다. 무감각과 무의미, 그리고 그에 저항하기 위한 애처로운 꿈틀거림으로서의 파괴적 정동이 자폐적 생각 내의 분위기다. 무한한 가능은 역설적으로 절대적인 불가능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한한 말과 그 말들의 조합에서 비롯하는 말장난들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말장난이 우리를 짓누르는 거대한 말의 체계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술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말장난이 말의 체계와 맞서 싸우는 장면을 떠올려 본적이 있나? 그 장면은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에서 군악대의 연주에 잔뜩 고무된 정예 병사들이 일시에 맞부딪치는 장관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차라리 외곽 도시의 가설무대를 전전하는 광대의 1인극에 가깝다. 말의 체계는, 그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동시에 우리를 구성한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장난 또는 농담에는 때로는 자학적이고, 때로는 광기어린, 심지어는 신성한 기운이 감돌기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터져 나오는 웃음은 지나칠 정도로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어 거의 비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가끔 상황이 잘 풀리면 우리는 잠시나마 생각 밖으로 도망쳐 나오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한밤중 남해의 해무를 지켜볼 때가 그랬다. 7-8년 전쯤 대학을 졸업하고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던 때, 친척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 며칠 묵었던 적이 있었다. 첫날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와 고향 친구들과 술을 진탕 먹은 사촌형이 새벽에 나를 깨웠고, 나는 비몽사몽간에 만취한 사촌형이 운전대를 잡은 트럭에 탔다. 여러모로 정신없는 상태로 20분쯤 달리니 이름 모를 작은 만灣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사촌형은 트럭 안에 있는 잡동사니를 하나하나 꺼내 바다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신문을 던지며 했던 말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세상의 일일,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정말 그렇다. 늦여름 더위마저도 삭여 없애는 자욱한 해무 앞에서 정치·경제를 운운한다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그런데 재밌는 점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사촌형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가 우리 사이에 벌어진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취해있지 않을 때의 그는 구태의연한 체계와 친숙한 사람이었다. 우리 동네에 나를 만나러 오면서 협력사 직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장해, 모임을 마친 후에는 그 차로 나를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기도 했으니. 정말이지 한밤의 그와 한낮의 그는 같은 사람이 맞는 걸까? 어쩌면 우주 단위의 알 수 없는 힘이 양 극단의 오묘한 균형을 한 사람 내에서 구축해내는 걸까. 그렇다면 나의 경우는? 모르겠다. 날이 더워서인지 말이 길고 복잡해서인지 머리가 점점 뜨거워진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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