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리샤 록우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by 세포뭉치

인터넷 끊기는 나의 숙원사업이었다. 아마 10년 이상 묵은 것 같다. 심지어 최근 몇 년 동안은 인터넷 끊기가 ‘새해다짐’에 포함되기도 했는데, 이건 꽤 놀라운 일이다. 나는 하루 이상의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상당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인터넷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피곤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나는 어떠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 세계에 뛰어들었던 것 같은데, 왜 그런 추구가 피곤함으로 끝나고 마는 걸까. 이 피곤함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책을 빌리고 표지나 책날개를 들춰볼 때에는 이 책이 그런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첫 장을 펼치기 전까지는.


첫인상은 거의 혼돈에 가까웠다. 인터넷을 떠도는 무맥락의 정보들이 제각각의 언어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인터넷 비판을 위한 정제된 논증들, 아니면 적어도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문장들이 아니라 그저 날것 그대로가 거기 있었다. 아직도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는 “개도 쌍둥이가 될 수 있나?” 같은 문장들이나 ‘칸디다 과다증’이라든지 ‘caucasianblink.gif’ 같은 밈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 책은 지성을 사용해 내용을 일관되게 파악해 보려는 나의 노력을 비웃고 있었다. ‘그냥 던져 버릴까’ 5번쯤 고민하고 막 시행에 옮기려는 순간, 1부가 끝났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이 책의 1부를 175쪽짜리 고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게 전부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인터넷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그저 나열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즐기려는 목적으로 ‘선택’했다고 하는 인터넷 접속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는지 보여주었다. 때때로 인터넷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지만 그 칼로는 어떤 것도 벨 수 없음이 명백했다. 그 칼을 쥔 작가조차 이 늪과 같은 사회에 머리끝까지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2부에서 주인공의 여동생이 아기를 낳게 되면서 상황은 반전을 맞는다. 아기가 생명에 위협이 되는 심각한 기형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아기의 대모를 맡게 된 주인공은 태어난 아기를 처음으로 안아보면서 잊고 있었던 감각을 다시금 깨우치게 된다. “누가 아기를 품에 안겨주는 순간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정신은 단순히 세상에서 살아내려고 애쓰는 어떤 것이었다.”(217) 앞을 볼 수도, 제 힘만으로 숨을 쉴 수도 없는 아기가 쉴 새 없이 꿈틀거리며 주변 환경에 감응하는 것을 보며 주인공은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깨닫게 된다. 누구나 응당 수행해야 할, 타인을 향해 쏟아질 의무를 말이다. 기존에 주인공의 존재가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재호명, 사회적 인정에 기대어 위태롭게 지탱해나가는 자기 확인이었다면—“다른 방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약한 전류처럼 느끼며…”(129)— 아기를 만나게 된 후의 주인공의 존재는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한 말—“우리 작은 개가 나를 아니까 나는 나야”(293)—처럼 타자와 서로의 눈빛과 몸짓을 통해 얽힌 공동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열려 있었다. 활짝 열려서 무엇이든 쏟아져 들어올 수 있었다.”(259)


신성하게 느껴지는 아기의 모든 움직임이 우리에게 말한다. 아니, 우리 모두가 거쳐 왔으며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 몸 깊숙이 그 흔적을 품고 있는 꿈틀거림이 우리에게 명령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살라고.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명령은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에 대해 수없이 많은 둔탁한 말들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오늘의 깨달음이 다시금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빨려들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세상에서 이 작고 소중한 깨달음에 먼지를 묻히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을까. 어쩐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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