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함께 살았던 멤버들이 하는 일은 그들의 취향만큼이나 다양했다. 스타트업 창업가, 원격 근무하는 개발자, 소셜임팩트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원, UX 디자이너, 온라인 서비스의 커뮤니티 빌더, 문화예술 교류 프로그램 기획자 등. 다양하긴 해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코리빙 스페이스에 산다고 했을 때 '음, 놀랍지 않군'하고 받아들이기 쉽다. 상상이 간달까. 반면 가장 의외로 생각될만한 사람이 있었으니, 변호사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지혜였다.
수능, 고시 등과 같이 한방이 걸려있는 경쟁적인 시험공부라고 하면 대체로 ‘고립’이 떠오른다. 고시생들은 고시촌에서 각자의 굴 방에 들어가 세상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단절한다. 누군가는 암자에 들어가 공부했다고 하지만 그 사실이 놀라운 듯 놀랍지 않다. 지혜의 첫 시험 준비 기간 2년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단절이 자신에게는 효과적인 방식이 아님을 깨닫고, 서울눅스에서 따로 또 같이 살며 수험 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세상이 입 모아 완전한 고립이 정답이라고 말할 때, 연결을 선택하다니 굉장한 모험가다! 자신의 필요를 잘 이해하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용기 있는 결정 아닌가.
새벽 6시부터 공부 스케줄을 시작하던 그녀는 공부 시간을 밀도 높게 쓰고, 쉬는 시간 역시 확실하게 쉬면서 애쓴 스스로를 잘 보상해주었다. 주중 오후에 카페로 나가 공부를 하기도 하고 주말에는 영화 한 편을 찾아보면서 스트레스에 압도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큰 시험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함께 산다는 자각을 크게 할 필요가 없었다. 커뮤니티는 그녀 합류하기 전과 같이, 아니 오히려 그녀 덕분에 활기가 더 돌았다. 그는 맛있는 것이 있을 때 나누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지 물었다. 타고난 커뮤니티형 인간이었다.
11월 중순 즈음. 공기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당연히 이전보다 불안과 압박감을 많이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공부를 대신할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좋은 페이스메이커(Pace Maker)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지혜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고, 자는 시간에 맞춰서 잤다. 우리 방이 딱 같이 붙어 있기도 해서 혹여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길 바랬고, 새벽에 홀로 일어나 외롭지 않길 바랐다. 비슷한 시간에 식사를 함께 했고 외출에 기쁘게 동행했다. 카페로 가는 막간을 활용해 같이 수다를 떨었고 수험의 무게를 털고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길 바랐다. 초조함에 정신적으로 붕괴될 때 격려했고, 때론 같이 울었다.
어느새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언제 오나 싶었던 결전의 주간이 된 것이다. 한 주간 진행되는 시험 마지막 날, 함께 택시를 타고 시험장으로 갔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시험이 끝날 때쯤 그를 마중하러 다시 돌아왔다. 부모들이 차로 마중 나온 서울 사람들에 뒤질세라 나도 택시를 미리 불렀다. 집에 돌아와 그가 좋아하는 잭슨피자를 시키고 당분간 참아야 했던 영화 한 편을 같이 보며 울고 웃었다. 그는 며칠 내 고향에 돌아갔다. 누적된 피로를 녹이며 참아야 했던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러 간 그는 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그렇게 커뮤니티에서 3개월 간 부재했다.
그 3개월간 내게도 지지가 필요한 일들이 있었다. 커뮤니티 내 다양한 멤버들이 지지해주었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의 부재는 아쉽고 서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실 내가 지지해 ‘주었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데 내가 오른손으로 준 사랑을 왼손으로 받을 기대를 못 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준 지지가 그만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내 멋대로 쓸쓸했다.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깨닫게 된 건 계절이 하나 지나고 나서였다.
그 해 초 여름, 사정상 다른 코리빙 스페이스에서 2개월간 살다 들어오게 됐다. 다 커서 하는 가출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게 짜릿했다. 같은 코리빙이지만 우리 집과는 굉장히 다른 곳이었다. 옛날 호텔로 이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9개 층 규모의 건물에 3개 층 정도가 공용공간이었고, 나머지는 다 개인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인실에는 다 욕실이 있어 편리했지만, 동시에 마음먹지 않으면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었다. 2개월을 지냈는데 결국 아무도 사귀지 않았다. 심지어 옆 집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이사를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해되거나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이 적은 것은 편했다. 밤늦은 시각에도 TV를 볼 때 이어폰 없이 소리 틀어놓을 수 있고, 욕실 이용 순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결벽증을 툭툭 건드리는 요소들이 없는 생활은 퍽 평화로웠다. 홀가분한 자유를 만끽하면서 내가 우리 집에서 받아오던 스트레스의 양을 새삼 깨달았다. 동시에 내가 빚지고 있었던 것들 역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방해’가 없는 환경에서 밀린 일을 집중적으로 해치워야지 - 하고 의지를 활활 태우며 입주했지만 영 실패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는데 내가 좋아하거나, 자신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종래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의지는 금방 사그라들었고, 대신 활성화된 건 불안이었다. 아예 내 위에 올라 작두를 타기 시작했는데, 프라이버시가 훨씬 잘 보장되는 곳에서 이를 제지할 사람은 없었다. 누가 자가격리를 시키는 것도 아닌데 두문불출하며 밤늦게까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탐닉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스스로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울 앞에 이성은 매가리가 없었다. 무너진 습관은 일을 밀리게 했고 이는 스트레스를 더 키웠다. 완벽한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깨달았다. 너를 지지하는 일은 나를 지지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상대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두 발 단단히 내딛고 서있어야 한다. 지혜를 지지하기 위한 사소한 마음 씀씀이는 곧 나에게 좋은 일이었다.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며 나의 페이스가 유지할 수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더 성실하고 생산적인 하루를 살았고, 이를 통해 자존감을 건강한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에게 영감이 되기 위해 도전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나만을 위해 노력할 때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적으로 노력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일부러 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응원하던 메시지들을 가장 크게 듣는 사람은 사실 그 말을 하고 있던 나였다. 남에게 하는 이야기와 나에게 하는 이야기를 뇌는 구분하지 못한단다고 한다. 자기 계발 분야의 많은 서적과 영상에서는 확언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평소 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다.
자신에게 유독 엄격해 스스로에 대한 칭찬과 격려에 인색한 사람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선 열렬한 치어리더가 된다. '무슨 소리냐고, 네가 얼마나 멋진데, 네가 얼마나 훌륭한데, 네가 남자면 내가 사귀었다!' 방금 한 말을 스스로에게 해보라고 하면 어려워하지만 자꾸 상대에게 말해주다 보면 언젠가 일어나지 않을까. 나도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는 일.
지지는 일방적이지 않다. 한자 사람 인을 여러 번 머릿속에서 그리면서 그 사실을 다시 새겼다. 어느덧 서운함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빈자리에 고마움이 가득 찼다. 이 커뮤니티를 위해서 하는 내 모든 행동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었다. 호구는 없었다.
2개월간의 가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천천히 무너졌던 내 마음과 생활을 다시 가지런히 세우기 시작했다. 때로 동거인들을 지지하고 때로는 그들의 지지에 기대면서. 지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기꺼이 지지하고 싶은 이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 모인 커뮤니티가 내게 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