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센짱 Feb 15. 2022

우리는 과연 가족일까?

가족의 기준 

"가족이 몇 명인가요?"

가족을 주제로 한 어떤 이야기 모임의 첫 질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아니 국민학교 시절에나 공개적으로 했을 것 같은 호구 조사가 떠올랐다. 이걸 질문이라고…. 심드렁하게 4명이라고 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다. 대충 3명에서 5명 사이의 숫자로 엇비슷하게 답이 모였다. 이윽고 제시된 다음 질문들은 차례대로 우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숫자에 포함된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기준은 무엇인가요?”

“금방 말한 가족 구성원과 같이 살고 있나요?”

“같이 살고 있지 않다면, 같이 살고 있지 않은 다른 가족들과 그 가족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참여자들은 대체로 한 집에 사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여전히 가족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답하기 쉬웠다. 하지만 지방 출신인 나는 달랐다. 교육환경 문제로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고, 동생 역시 수도권에 자리를 잡았지만 따로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가족 수를 대답할 때 아빠, 엄마, 동생까지 포함했다. 같이 살지 않음에도. 아마도 대부분이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같이 사는 것이 가족의 필수요건이 아니라면 왜 나는 할머니를 제외시켰을까? 같이 살고 있지 않은 점은 동생과 똑같은데 말이다. 명절 때 부모님 댁에서 뵙는 것을 제외하면 나와 동생은 따로 연락하거나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 누구 말마따나 내게 동생은 ‘엄마의 아들’이고, 동생에게 나는 ‘아빠의 딸’ 정도에 가까웠다. 그 정도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동생에 비해 할머니가 덜 가족일 이유는 없었다. 어릴 적 아빠한테 대차게 혼날 때 방패가 되어주었던 게 바로 할머니였다. 그렇다면 이모는? 왜 친척들은 자연스럽게 가족의 수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옆자리에 앉아있던 M은 나보다도 동생과 사이가 안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동생을 3% 가족이라고 생각해. 난 걔가 너무 싫어. 우린 서로 싫어해. 아니 너무 달라서 서로 안중에 없어.” 가족이냐,  가족이 아니냐. 그런 0과 1의 문제가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가족의 의미를 보자는 것이었다. ‘얼마나 가족인가.’ 타당한 제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동생 사이에 적용하자면 대략 20% 에 못 미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정도여도 여전히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0퍼센트 이상이면 가족으로 충분한 걸까.


함께 사는 것의 의미

함께 산다고 다 가족이 되진 않는다. 역으로 함께 살지 않아도 가족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집살이가 가족을 정의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Family의 유래가 되는 라틴어 Familia가 집 안에서 같이 생활하던 모든 사람들(노예까지도 포함)을 의미하고, 가족(家族)의 한자에도 '집'을 뜻하는 한자가 들어간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함께 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갑작스럽게 아플 때 당장 의지할 수 있다.
한 번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쳐서 집에 돌아왔다. 응급실 비용이 무서워서 미련하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돌아온 나를 모두가 에워쌌다. 옷이 찢어진 곳을 걷어내고 상처 부분이 드러나자 함께 탄식을 내뱉었다. 소독이 필요했다. 모두의 약통을 다 펼치니 필요한 것들은 다 거기에 있었다. 두 친구가 협동하여 소독을 해주는 동안 또 다른 친구는 고통에 펑펑 우는 나를 토닥였다. 날카로운 고통 가운데 고맙다는 마음이 뭉근하게 올라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하다가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을 땐 이보다 더 지속적으로 의지하기도 했다. 꼼짝없이 집순이가 되었고 집 안에서도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했다. “뭐 필요한 것 없어?” 외출할 일이 있으면 매번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물어봐주는 친구. 집안에서도 잔심부름이나 부축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달라는 친구. 부기 빼는데 좋은 약을 사 와주는 친구.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지속적인 서포트를 받았다. 


둘째 서로의 안전을 챙길 수 있다. 
모두 다 큰 성인이기 때문에 통금 시간 따위는 없지만 늦거나 집에 안 들어오면 괜히 걱정이 된다. 데이트가 잘 풀려서, 그저 일이 너무 많아서 늦거나 안 들어오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그러면 조심스럽게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한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무슨 문제없지? 잘 들어오고 있어? 조심해서 와! 혹시 무서우면 연락해. 내려가 줄게!” 자정을 넘겨 황폐화된 몸과 마음을 질질 끌며 퇴근하는 길. 이때 받은 연락이 얼마나 따뜻하던지. 귀갓길뿐만이 아니다. 불이 켜진 집을 들어갈 때, 혹 내가 혼자 있게 되어도 곧 누군가 와 혼자가 아니게 될 것을 알기에 생기는 이 안전감. 혼자 살 때는 마음 한편에 늘 켜 두고 있던 비상등을 꺼둘 수 있어 매일 편히 잠에 든다.


셋째는 일상 속의 소소한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날도 자정 넘게 퇴근했다. 보람도 즐거움도 없는 날. 이대로 자기 괜히 억울해서 거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땄다. 거실에는 나 말고 다른 친구가 한 명이 있었다. 스위스 회사에 원격으로 일해서 그 시간대에 주로 일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친구가 상냥하게 물어준 안부인사에 답하는 도중 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만 뒤엔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는 하던 일을 놓아두고 쪼르르 달려와서 토닥여주었다. 한동안 옆에 앉아 내가 울먹이며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도 조용히 고백했다. "나도 사실은 불안해." 의외였다. 그리고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외롭지 않았다. 

"어, 왔어?" "수고했어" "오늘도 퇴근이 늦네. 너무 피곤하겠다." "오늘 어땠어?" "잘 잤어?" "잘 다녀와!" 이런 일상의 대화들은 소소하지만 그 가치는 소소하지 않다. 같이 살았던 친구들에게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물었을 때 핼러윈 파티나 크리스마스 파티보다 이런 일상 속 소통들을 꼽는 친구들이 많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이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잦은 빈도로 느끼는 것이 관건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식구(食口)가 별거니?
한데 모여 살구, 같이 밥 먹구, 같이 울고 웃으면 그게 가족이지.
우린 모두 식구야


출처: 영화 <고령화가족>


식구

같이 밥 먹는 사이, 식구(食口). 그러니까 같은 집에 살아도 같이 밥상을 하지 않는다면 엄연히 말해서 식구가 아닐 수 있다. 진짜 한 집에 사는 가족들끼리도 같이 밥을 먹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매년 낮아지는 가족 식사 비율을 우려하는 뉴스가 쏟아지던 시기가 있었다. 이젠 너무 익숙해져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요즘, 우리가 서로를 식구라 부르는 것에는 어떤 부족함도 없어보인다. 

우리는 자주 같이 밥을 먹는다. 일부러 같이 먹을 때 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밥 먹는 시간대가 비슷해 각자의 식사를 준비했을 뿐인데 한 밥상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 이상의 밥상이 합쳐지면 정말 그럴싸하고 풍성한 한상이 된다. 식사를 준비하러 온 시간까지 맞는 경우엔 함께 요리를 하기도 한다. 또는 누군가 요리를 하면 다른 사람이 뒷정리를 하기도 한다. 함께 밥을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새로운 형태의 식구를 꾸리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사뭇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가족'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상이 편협하고 이상에 갇혀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내 진짜 가족에 대해서도 '이것이 가족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소외감 마저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족이 꼭 하나일 필요도 없다. 종래 한 가족에 기대해온 여러 가지 기능들을 분산해 여러 가족 관계를 통해 해소한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롭지 않을까. 더 풍요롭게 되지 않을까. 


가족이란 둘 또는 그 이상의 가족원들이 서로 돕고 몰입되어 있으며, 애정과 친밀감, 가치관과 의사 결정, 자원을 서로 나누는 집단이다. (Olson &DeFrain, 1994)
가족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주며, 가족원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는 다른 가족원을 통해 안도감의 욕구가 충족되는 장소(Erber &Erber, 2001 ; 정현숙 외, 2001, 재인용)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개체성과 반개체성, 즉 개인으로서의 '나'와 관계로서의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호작용하는 생활 공동체적 집단 (유영주, 2000)


내친김에 가족의 정의를 찾다 가장 공감되는 세 가지를 만났다. (이런 정의가 90년대 말, 2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는 것에 놀랐다. ) 그래 그렇지! 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다가도 생경하다. 나름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족에 대한 정의는 꽤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가족이 별 거인가. 오래된 가족의 개념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 때문에 가지고 있는 불안 -  '결혼에 실패하고 혼자 늙어 죽는 것'은 내려놓아도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혼하지 않아도 식구를 가질 수 있다. 지금 이 커뮤니티가 지속되지 못한다고 해도 이후에는 또 다른 이들과 식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식구들은 다 가족이라고 인정하기로 한다. 


다시 이야기 모임의 첫 번째 질문 "당신의 가족은 몇 명입니까?"을 바라본다. 답을 고칠 순서다. 
"생각해보니 제 가족은...."

이전 18화 사람들 사이 그 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