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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짱 Oct 30. 2022

어떻게 소속하며 살 것인가

"아, 쉐어하우스 같은 거예요?”

내가 친구들과 여럿과 같이 산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묻는다. 아, 네 맞습니다 - 하고 넘어가면 쉬울 것을 융통성 없는 난 또
 이걸 정정하고야 만다. "예에 - 쉐어하우스와 유사한데, 쉐어하우스는 아니고요. 코리빙하우스에요. 그렇다고 그렇게 큰 곳은 아니고요. ” “코리빙이요? 그게 뭐예요?” 왜 괜히 설명할 거리를 만들어 귀찮은 일을 벌리나 스스로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굳이 굳이 구분 지어야겠다. 왜냐면 쉐어하우스가 우리를 정확하게 설명해주진 못하니까. 


대관절 코리빙하우스(Coliving House)는 뭐길래. 쉐어하우스(Shared Houses)와 뭐가 그리 다르길래. 


내 답은 간단하다. 뭐니 뭐니 해도 커뮤니티다. 같이 사는 것이 목적이냐, 아니면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냐의 차이로 둘이 나뉜다고 생각한다. 사이좋게 지내는 쉐어하우스도 많겠지만 보통 그건 운이 좋을 때의 이야기다. 쉐어하우스에서의 커뮤니티는 두부 만들 때 나오는 콩비지에 가깝다. 콩비지는 운이 좋으면 활용이 되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버려지는 부산물이다. 콩비지를 팔지 않는다고 두부 가게에 가서 항의할 순 없다. 반대로 코리빙에서 커뮤니티가 핵심이다. 케바케, 사바사, 쉐바쉐(쉐어하우스 바이 쉐어하우스), 코바코(코리빙 바이 코리빙)겠지만 우리는 그렇다. 


내가 이 집을 운영하는 이유, 여기서 사는 이유 모두 커뮤니티다. 만약 모든 커뮤니티 빌딩 노력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커뮤니티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만 모인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이 공간을 접을 것이다. 공간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품만큼, 아니 사실상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더 좋은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쓴다. 공간은 거들 뿐이다. 그렇다면 커뮤니티란 무엇이고, 왜 그토록 중요한가. 




있는 그대로 보기


“글쎄, 사람들이 나를 자주 오해해.” 


다이애나에게 왜 그렇게 자주 한국에 오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독일에서 온 그는 자기 고향에 있으면 답답하다고 했다. 그의 회사, 대학원 때때로 심지어 가족까지. 그는 자주 오해받았다. 필리핀계 독일인으로 겪는 각종 인종 차별은 기본이고, 그의 외양과 라이프스타일, 직업의 합은 그 오해를 강화했다. 대학원에서도 꾸밈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학습 성과를 학교에선 자꾸 의심했고, 회사 사람들은 그가 한국에 갈 때마다 너 또 놀러 가냐며 부러워하는 듯하면서 그의 성실성과 퍼포먼스를 진지하게 보지 않았다. 그게 아닌데.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는 동안 그에게 가족 같은 커뮤니티가 이곳에 생겼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것이었기에 내한은 그에게 귀향에 가까웠다. 


나는 의외의 이야기에 내심 뜨끔하면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 역시 그녀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날 본 그의 모습은 강렬했다. 진한 메이크업, 몸에 딱 달라붙는 짧은 원피스, 강한 미국 캘리포니아 스타일의 영어톤에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내가 줌(Zoom)으로 인터뷰했던 다이애나는 차분하고 진지하고 나처럼 너드 같아 보였는데.... 너무 화려해..! 같은 사람인가 과연?? VR을 연구하면서 콘텐츠 마케팅 일을 하고, 운동으론 태극권을 한다는 그 사람? 첫인상만 봐선 얍실얍실 피상적일 것 같은데...? 이거 참, 멤버 선발 잘못 한 거 아냐? 어떡하지? - 


그 오해를 푸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같이 살아서 다행이었다. 한집에 살기 때문에 나는 그의 다면적인 모습을 고루 볼 수 있었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동상을 한 바퀴 빙 돌며 감상하듯. 그는 외출할 때는 세상 
화려하지만 실제로 세상 털털하고 소탈했다. 논문 주제에 대해 감탄스러울 정도로 설명을 잘해주는 지적인 사람인 동시에 이태원 클럽 거리에 가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밖에서 만나면 손에 물도 안 묻힐듯 세련되어 보이는데, 누수가 일어나면 누구보다 침착하면서도 발 빠르게, 또 유쾌하게 대응했다. CL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강렬한 눈 화장 때문에 센 언니 같아 보이지만, 나만큼 눈물 많은 여린 사람이라는 걸. 같이 지냈기에 믿을 수 있었다. 




소속감 


고향에서의 오해가 그를 계속 떠나게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해는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한두 번의 오해는 웃어넘길 수 있지만 지속된 오해는 결국 존재를 흔든다. 오해에 대해 반복해서 해명하는 동안 우리 영혼의 일부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문 밖을 서성이다 에너지를 잃는다.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교정하기도 한다. 소속하기 위해. 해명할 필요도, 교정해야 할 압박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을 때, 인정 그 이상으로 환대 받을 때 우린 소속감을 느낀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소속감의 빈곤을 겪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환영받지 못한다. 정보의 홍수가 아닌 오해와 왜곡의 홍수 속에 살면서 모두가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다. 가족, 고향, 학교, 직장 - 전통적인 삶의 트랙으로 달리면 달리 고민하지 않아도 주어지던 소속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 시대다. 기성 소속이 주는 소속감 역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고, 모두를 만족시키지도 못한다. (아니, 이전에도 모두를 만족시켰을지 의문이다.) 


그 빈자리를 메꾸고자 크고 작은 새로운 종류의 커뮤니티가 우후죽순 많이 생겼다. 하지만 소속감은 오히려 요원해졌다 느끼는 건 나뿐일까. 3개월 기간형 커뮤니티 멤버십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나는 더 헛헛하고 외로웠다. 그러한 소속감에 대한 갈증과 질문이 지금의 따로 또 같이 사는 커뮤니티 리빙 실험에 이르게 했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소속감을 느끼고 있을까? 글을 쓰는 이번주 내내 외롭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혹 같이 살아봤자 달라지는 게 없는 걸까. 인간살이 원래 그냥 외로운 걸까. 아니면 이전에 비해선 덜 외롭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왜 오늘 이렇게 같이 살아가나. 


생각해보면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오해받지 않는다. 겉과 속, 앞면과 뒷면, 오른면과 옆면. 보이고 싶은 부분, 보이고 싶진 않지만 보게 된다면 수용받았으면 하는 부분까지 드러내보이며 살고 있다. 축구필드 위에서 거칠게 몸싸움하고 목소리도 제일 크지만, 집안에서 가장 상처를 쉽게 받고 눈물이 많은 울보. 어떨 땐 흥이 폭발해 무대 위에 올라가 춤을 추기도 하지만, 의외로 낯가리고 파티에 가면 구석에 짱박혀 있는 찐따. 여러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서 과감해보이지만 사실 생각이 정말 너무 많은 오버띵커(overthiker), 빈티지하고 감성적인 것을 좋아하면서 효율성, 생산성 툴과 기기를 그 못지 않고 좋아하고 진심인 너드. 때로 모순적인 나의 모습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 모순들이 드러나는 것에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아 - 그렇구나. 외로워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구나. 소속감을 느낀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구나. 나는 여기 소속하고 있구나. 


지리산 자락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길. 저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산 아래 우리 집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그 남산타워가 점점 커질 때 나의 마음은 안도했다. 아, 집에 왔다.


 “소속감이란 한밤 중에 깨어나도 내가 친구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안도를 느끼는 것” 

누군가는 소속감에 대해 이렇게도 정의했다. 속 시끄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지만 나는 한밤 중에 잘 깨지도, 깬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두려움에 압도되는 일은 없다. 그 맛에 오늘도 굳이 같이 사는 하루를 선택한다. 다이애나에게도 오늘 밤이 평온 하길. 한밤 중에 깨더라도 안도감이 포근한 이불처럼 그를 감싸길, 우리 커뮤니티 내 다른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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