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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짱 Oct 30. 2022

밥은 먹고 다니니?

잘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먹고는 다닙니다

"잘 지내시죠?" 정말 간단한 질문인데, 나는 매번 답을 머뭇거린다. 나는 잘 사는 것일까? 자주 부끄럽고 말문이 턱턱 막힌다. "에에..." 애매한 대답이 내 최선이다. 그런 대답 후에 잘 산다는 건 뭘까, 쓸데없는 상념에 다시 잠긴다. 그래도 이렇게 친구들과 같이 살면서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안부 인사 한 가지는 생겼다. 바로 밥은 먹고 다니냐는 안부다. "식사는 하셨어요?" "밥은 잘 챙겨 먹니?" 밥심이 너무 중요한 한국인들 특유의 이 밥에 관련된 안부인사. 이 인사에 대답할 때만큼, 나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굿바이, 카레 

어찌 보면 이렇게 큰 집에서 큰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된 건 손이 커서 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유난히 손이 컸다. 2인분을 목표로 하면 4인분이 만들어졌고, 4인분을 만들려고 하면 7인분 정도가 되었다. 그런 인간이 밥을 1인분씩 해 먹는 게 어찌나 귀찮고 허탈한 일이겠는가! 일인분을 위해 요리하는 것은 비효율 그 자체다. 밥을 하고 치우는 건 영겁인데 먹는 시간은 찰나이니. 돌아서자마자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니.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과 실제로 식사를 하는 시간, 이 둘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보고 나면 1인 가구의 식단은 자연스럽게 카레를 중심으로 진화하게 한다.


아, 내 영혼의 동반자이자 구원자인 카레! 많이 하면 여섯 번 먹을 분량이 나오는 데다 김치만 있으면 완성인 원푸드 요리. 심지어 건강하기까지! 한 냄비 가득 만들어서 냉장고에 비축해놓으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질리지도 않는… 줄 알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질려버리는 날이 결국 오고야 말았다. 인생 섭취 카레 섭취 총량 임계치에 도달한 느낌이랄까. 듣는 카레는 섭섭하겠지만 작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


‘덕분에 자취를 시작했던 17살부터 30대 초반까지 잘 생존할 수 있었다. 인체의 70퍼센트가 물이라고 하는데 나의 70퍼센트는 어쩌면 너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하지만 이제 가끔씩만 보자.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하다. ’


풍성해진 식탁

여럿이 같이 살면서 내 식단은 한층 다채로워졌다. 예은의 고향에서 보내주신 사과잼, 제임스의 버터 치즈 파스타, 지현의 닭갈비, 케빈의 미트소스 파스타, 윌리엄의 메밀 죽, 유미의 크레페, 정운의 비빔국수, 토마스의 타코, 수현이 시킨 에그 드롭, 혜림이 구독하는 반찬 패키지의 반찬 - “한 입 할래?” “이것도 먹어봐.” 각자 먹을 것을 따로 준비해 같이 앉기만 해도 충분히 풍성하다. 


카레로 시작해서 카레로 돌아와 다시 카레로부터 시작되는, 도돌이표 같던 식단에 흥미로운 변주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요리를 함께 즐길 사람이 있다는 것과 다른 누군가 뒷정리는 맡아준다는 사실은 나 역시 평소와는 다른 요리를 시도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카레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고 효율이 떨어지는 요리 말이다. 그렇게 나의 맛의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었다. 


“파전 먹을래?” 김치를 손수 담가 먹는 대한외국인 티모시가 주방에 들어서면서 나에게 물었다. 파전이라니. 무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오는 파전이 아니라, 홈메이드 파전을 먹는다니. 내 손에 기름 묻히지 않고 먹을 수 있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좋아!” 요리를 돕진 않았지만 재료를 조금 보탰다. 냉동칸에 짱박혀 있던 냉동 해물을 건넸다. “다 써도 돼” 선심 쓰듯 줬지만 사실 빨리 치워버리고 싶었다. 냉동칸에 자리가 생겨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파전은 해물파전으로 그 급을 격상했다. 대낮이지만 그냥 먹을 순 없으니 막걸리도 꺼내 조금 곁들였더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물론 설거지는 내가 맡았다. 


식사 그 이상의 의미

혼자 먹을 때는 내게 식사는 주유와 같은 개념이었다. 나는 자동차. 후다닥 때우거나 해치운다. 시간을 유용하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 자기 계발 영상이든, 드라마 요약 영상이든 뭔가를 보면서 먹기도 한다. 하지만 허기진 상태에서 흩뿌리는 자극들은 남는 게 없다.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맛이었는지, 무엇을 봤는지, 돌아서는 순간 잊혀진다. “와 이 샐러드 진짜 맛있다.” 샐러드가 맛있다는 걸 뭔가. 누군가의 호들갑스런 감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재료들이 주는 감각에 조금 더 머물러 본다. 다채로워진 밥상 위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오고 간다. 각자의 고민, 사회에 대한 불만, 갑자기 떠오른 작당모의 아이디어. 매 밥상은 각각 고유한 형태의 기억이 된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미쳤다! 요리까지 잘하면 어떡해?” 

아낌없이 팍팍 토핑 되는 진심 100프로의 무농약 칭찬에 내 효능감도 잠깐 부풀어 오른다. 세상의 변화에 도움이 되고 싶었던 어릴 적 꿈과 달리 스스로를 돕는 것조차 버거운 때, 내 요리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인정을 받는 기쁨은 소소하지만 하찮지 않다. 밥알과 함께 삼킨 그 말들은 내 자존감이 추락할 때 미끄럼틀을 타지 않도록 저지선의 역할을 할 것이다. 풍성한 식탁 앞에 앉은 시간 만큼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끼어들 틈이 없다. 미생의 삶이었지만 식탁 앞에서만큼은 온전하다. 집 안으로 퍼져가는 다른 냄새와 소리. 따로 또 같이 쓰는 주방은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감각을 자극한다. 여러 번 되새김질할수록 더욱 강하게 퍼져가는 맛있는 기억들이 우리 몸과 공간에 차곡차곡 쌓인다.


“야, 우리 진~짜 잘 먹고 산다.” 우리의 식탁에 새삼 놀라 이렇게 소리내어 감탄하곤 했다. 이 감탄에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진하게 배겨 있다. 지이인짜라고 쓰는 게 정확하겠다. 잘못 들으면 화가 난 것 같은 톤의. 그 대답에 '잘'을 한 번 더 넣는 건 왜인지 부담이 없다. 네, 잘 살아요. 지이인짜 잘 먹고 잘 살아요. 잘 먹으면 잘 사는 것의 반 이상은 한 거 아닌가. 배도 부르고 얼렁뚱땅 넘겨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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