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어를 도입하게 된 배경
"왜 초면에 나이를 꼭 물어봐?"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문화 중 하나는 초면에 나이와 같은 개인적인 정보를 묻는 것이다. 이 사람을 언니라고 부를지, 존댓말을 써야 할지 정해져야 그에 맞게 대할 수 있으니까. 좀 더 편하게 대할지, 동갑이라면 말을 놓을지, 많이 나이가 많으면 더 깍듯하게 대해야 할지.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분해서 장유유서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윗사람은 본을 보이고 때로는 아랫사람이 옳은 길을 갈 수 있도록 교정하며, 아랫사람은 이를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순리니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그런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1학년 중 몇 명이 예의 바르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1년 위 선배인 2학년들이 이들에게 집단 기합을 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한편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내리사랑을 베풀어야 할 의무 역시 지워졌다. 선배들은 종종 후배들의 밥을 사줬다. 지루한 급식을 건너뛰고 선배를 따라 인근 대학교 앞 식당가에서 외식하게 되면 그렇게 신이 났다.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식당 '카라'에서 스페인 돈가스를 사주는 선배에게는 존경과 충성심이 자동적으로 생겼다.
한편 의아함도 지울 수 없었다. 선배들이라 해봤자 고작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1학년이나 2학년이나 용돈 받아먹고사는 처지는 똑같은데, 왜 2학년이 1학년에게 밥을 사야 할까? 2학년이라 받는 용돈 수준이 급격히 달라지나? 그러기엔 너무 많이 사는데. 미안해하는 내게 선배가 의연하게 안심시키듯 대답했다. “우리도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너흰 다음 후배들한테 사면돼." 아 이 내리사랑. 강력한 장유유서. 내리사랑을 실천해 주는 이가 있으면 참 좋다.
‘누나니까 네가 참아야지' '누나니까 네가 좀 가르쳐줘야지.' 나 역시 엄마한테 질리도록 주입당했다. 언니, 누나란 호칭은 나를 굴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누나, 잘 먹었어요!” 밥을 먹자고 한 건 녀석인데, 연장자인 내가 돈을 내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선수 치는 후배를 겪으며 사회적으로도 학습되었다. 분명히 녀석이 나보다 세 배는 잘 벌 텐데 말이었다. 이렇듯 ‘언니’라고 불린 즉시 그 뒤 따르는 말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참고 희생하고 이해해 주고 양보해 줄 마음의 준비. 그래. 괜찮아. 아 물론이지. 아이고, 그랬구나.
우리 커뮤니티는 수평적 관계에 기반해 함께 만들어가는 커뮤니티를 지향한다. 모두의 개인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커뮤니티와 사람 사이 위아래를 인정하는 사상은 아무래도 공존이 어렵다. 위아래가 있는 환경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솔직할 수 없다. 솔직함 없는 커뮤니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장유유서와 수평적 관계는 세계관이 아예 다르다.
우리 커뮤니티의 공용어인 영어를 살펴보자. 영어는 존댓말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엄마뻘, 할아버지뻘의 사람일지라도 Sue라고 부르고 John이라고 부르지 않나. 나이에 따라 배려는 하지만, 나이가 자동적으로 권위나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렇듯 이 두 언어 사이의 커다란 세계관 차이 때문에 영어와 한국어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다른 멀티버스 사이를 여행하고 난 뒤 구토했던 닥터 스트레인저 마냥. 두 세계관에서 내가 관계를 대하는 자세와 그에 따라 마음먹기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평어를 도입했다. 뭐? 수평어? 생소한 개념에 동공 지진이 일어난 사람을 위해 간단히 말하자면 반말이다. 하지만 반말과 완전히 같진 않다. 반말만으로는 관계를 수평하게 해주지 않는다. 반말은 존댓말과 마찬가지로 윗사람, 아랫사람을 상정한 말의 방식이다. 또래가 아닌데 반말을 한다면 '위아래 관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끼리는 반말을 하기로 해.'라는 합의가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서로 수평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반면 수평어는 그런 개념 자체가 부정한다. 위, 아래의 개념이 없다. 담백하게 닉네임 또는 이름을 부른다. 언니, 누나, 오빠, 형 - 같이 가족 밖에서 가족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나이라서, 그 나이니까’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한다. 평균에 빗대 개인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나이에 따라 얼추 비슷한 성숙 과정을 거치는 것은 옛날이야기다. 성장과정도 제각각, 살아가는 방식도 제각각인 요즘에 특정 나이가 된다고 어떤 덕목을 자동적으로 갖추게 되진 않는다. 삼십 대가 되려면 이십 대일 때 이러이러한 경험과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필수요건으로 지정해 둔 것도 아니지 않나. 그걸 인증할 기관도 없다.
게다가 성숙이 뭘까. 성숙하다. 덜 성숙하다. 하나의 패러미터에 놓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성숙하다는 것은 착하다는 말만큼이나 너무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개념 아닐까? 성숙한 사람이라고 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세부 자질이 연상된다. 이해심이 많다, 포용적이다, 배려를 잘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높다, 책임감이 강하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겸손하다 등.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높지만 배려를 잘 못할 수도 있고, 겸손하지만 이해심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덜 성숙한 걸까? 게다가 성숙이 왜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성숙 말고도 커뮤니티 일원으로서 가지고 있으면 좋을 덕목들은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우리는, 그중 나를 포함해 한국인 멤버들은 특히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나 행동을 마주했을 때 나이란 프레임을 꺼내 들었다.
“아니, 나이를 그만큼 처먹었는데 이 정도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왜 그런 걸로 삐지고 난리지…?”
“어른스럽다고 했지만 역시 어린애였어.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없을 수가 있어.”
좌절감을 위로하기 위한 나름의 구사여책이었을 거다. 다만 이는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는 걸 방해했다. 그리고 그런 잣대가 커뮤니티에 존재하면, 그것을 알고 있다면 체면 차리느라 자기답게 솔직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게 만든다. 각자 다양한 속도와 다양한 모양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고 기여한다는 사실. 이를 인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위아래를 없애야 했다.
나이로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는 것에는 빠르게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라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멤버들끼리는 동갑이거나 나이 차이가 적지 않은 이상 존댓말을 썼는데 그렇다 보니 서로 친해지는 속도가 아주 더뎠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너무 조심조심한 탓이었다. 충분히 해도 될 말도 안 하고, 으레 하는 안전한 말들을 더 했다.
그러다 수평 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느낀 차이는 좁혀진 거리만큼 그의 진짜 모습과 또 진짜 마음이 조금 더 잘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가운 친구였구나. 정이 많았구나.’ 하고 사람에 대해 다시 보게 되는 경우들이 발생했다. 하마터면 모를 뻔했다니. 수평어를 도입하기 참 잘했다. 이렇게 거리를 빠르게 좁혀주기 때문에 커뮤니티에 갓 합류하더라도 더 빠르게 커뮤니티에 통합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다고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반감된 것도 아니다. 존중은 어미보다도 내용에 들어가 있으며 행동을 통해 더욱 드러난다고 믿는다.
물론 반론이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배우 이정재와 정우성 사례가 있다. 청담동 부부라고 불릴 정도로 소문난 절친인데도 아직까지 존댓말로 대화한다고 한다. 말을 놓지 않아 이렇게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누군가는 썰을 내놓는다. 그 부분도 동의한다. 나도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파트너와는 존댓말을 써보면 어떨까 싶다. 동갑내기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간이 이십 년 이상 보장된다면 그것도 좋다. 조금씩 사이를 좁혀가면 그 관계의 지반도 아주 튼튼할 것 같다.
이 방식에서는 그만큼의 기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서서히 사이를 좁히다 말고 그 상태로 동결되거나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런 경우엔 조심스러움 보다는 모험이 낫지 않을까. 연결이 필요하다면.
수평어를 도입하는 요즘 커뮤니티는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 나도 다른 커뮤니티를 통해 영감 받았으며 지금도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변화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더딘 걸 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꽤나 혁명적임을 보여준다. 한편 장유유서의 근본을 흔드는 만큼 수평어의 도입과 사용은 어떤 선언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그 자체로 해당 커뮤니티에 다음과 같은 가치를 이식시킨다. 가족적인 커뮤니티이지만 가족은 아니라는 것. 딸 같아서 부리는 오지랖, 동생 같아서 해주는 라테는 말이야, 장유유서에 입각한 상명하복 등에 커뮤니티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 너는 너. 나는 나. 완전한 독립된 개인으로서 너를 인정해 주고 너 그대로 보겠으니, 너도 나를 그렇게 존중해 주길 바란다는 것. 양보나 희생 대신 다정한 배려, 서로 책임감 있게 돕고, 솔직하고 성실한 소통을 하겠다는 것.
“거 참, 내 아들 같이 잘 생겼네.”
찰리, 미래, 에밀리 이렇게 동네 닭갈비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기분 좋게 취해 있던 할아버지께서 나가실 때 우리가 먹던 것까지 시원하게 사주시면서 찰리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내 분이 외국 분이냐고 여쭤보니 아니란다. 찰리는 백인 영국 남자인데… 그럼 닮았을 리가 없는데... 인종과 상관없이 전 세계가 하나의 가족이 되도록 하는 이 혁명적인 가족주의의 확장. 뭐, 때로 나쁘지 않다. 일단 돈이 굳었다. 앗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