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사는 글로컬 코리빙 하우스 서울눅스 프리퀄 4
외국인 친구들을 호스트 하는 걸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의 살림을 분리해야한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가는 것 말고 다른 방도는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이 이사하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이사에 비해 너무나 큰 일이었다. 공용공간의 90프로 이상이 언니네 신혼 가구들이었다. (이것이 내 성급한 판단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언니 오빠가 나가고 내가 그 쓰리룸을 쓰는 것을 동등하게 고려했다고. )
한편 같은 시기 망원동에는 현정 언니가 살고 있었다. 언니는 내가 망원동에 이사 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우리는 연희동 시절 때부터 이웃이었다. 심지어 도보로 1~2분 정도의 지척에 살았다. 상해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우연히 만나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부터 참 우리답다. 둘 다 해외 경험이 있고, 한국 사회와 핀트가 살짝 안 맞고, 커뮤니티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란 점 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급속도로 친해진 우리는 중국에서 돌아와 연희동에서 종종 만났다.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본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응답하라 1988도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서 동네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다룬 시즌이었다. 이웃인 우리는 그걸 보면서 함께 울고 웃었다. 그때부터였다. 서로를 이름 대신 네이버(Neighbor)라고 부른 건.
다시 같은 동네에서, 이번에는 망원동에서 10분 정도 거리의 이웃이 되어 만나면서 우리의 좀 특이한 호칭은 정당성을 이어갔다. 네이버를 주축으로 한 망원동 동네 친구 모임이 열리기도 했고, 즉흥적으로 따로 보기도 했다. 밥 먹었어요? 뭐 해요? 그렇게 연락하고 찾아가 차를 마시며 고민을 많이 나눴다.
이날 밤에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만났다. 각각 음료를 골라 편의점 앞의 파라솔에 앉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라 우리 집 창문이 바로 보였다. 집을 종종 올려다보며 현재 상황과 이사에 대해 가진 고민을 이야기했다. 새로운 집을 찾고 이사하는 것은 상상조차 피곤했다. 또 어디서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이 비슷한 하우스메이트를 구한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한편 네이버 역시 다른 친구 한 명과 쓰리룸에서 살고 있었다. 오랜 해외 체류 경험만큼 한국에 찾아오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을 재워줄 수 있도록 일부러 쓰리룸을 구한 그녀였다. 연희동에서 살던 집도 여러 외국인들과 함께 셰어하우스로 살았고, 그 외에도 외국인들 친구들과 공동 주거 경험이 많았다. 여러모로 비슷한 경험과 필요가 있는 우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민은 상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같이 사는 건 어떨까 하는.
마침 그녀의 집 계약도 그해 가을 만료될 예정이었다. 당시 강남 위워크로 출퇴근하고 있던 네이버는 이태원, 해방촌, 후암동 인근에 살고 싶어했다. 해방촌이나 후암동? 아직은 망원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썩 내키진 않았지만 한편으론 두근거림이 일렁거렸다.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이 참 근사하지 않겠는가. 우리야말로 하우스메이트로서 천생연분이 아닌가. '결혼은 타이밍이야' 아, 결혼 뿐만 아니라 하우스메이트로서의 연을 맺을 때도 타이밍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사의 타이밍 말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 타이밍이 맞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한번 알아나 보자!
방으로 돌아와 그 지역에 나와있는 집을 바로 검색해보았다. 3룸 이상으로 검색 조건을 설정했다. 검색 조건을 보니 3+로 되어 있다. 세분화해서 한번 포룸으로 한정해보았다. 그래, 주방, 다이닝룸, 거실이 분리되려면 쓰리룸으로는 충분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포룸 이상으로 검색하니 선택 사항이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또 없지도 않아서 신기했다. '포룸 이상의 집이 있긴 있구나' 각 동네에 확대해서 상세 검색을 하다가 후암동에 이르렀다. 그리고 가장 상단에 뜬 집을 보고 놀랐다. 벽난로? 서울에 벽난로가 있는 집이 있다고? 거기다가 방이 다섯개? 부동산에 연락해서 물었다.
"벽난로 있는 집이요, 내일 방문해볼 수 있을까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