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는 사람끼리 굳이 회의를 해야 할까?

글로컬 코리빙 스페이스 Seoul Nooks의 커뮤니티빌딩 15

by 센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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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인은 칼을 사용하고 난 다음 꼭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곤 했다. 나는 처음에 말없이 그 칼을 치웠다. 별 거 아닌 일이었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한편으로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칼을 바로 치워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자각하길 바랬다. 그리고 그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칼은 매번 미아 신세였다. '스스로 자각하기도 전에 내가 치워버리니까 자기가 얼마나 자주 칼을 방치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한번 그대로 두고 며칠 기다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다음 사용까지 칼은 또 아일랜드 바 위에 한동안 방치됐다. 마치 그의 눈에는 칼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다음 추측 '음, 바빠서 그런 걸 거야!'도 어긋났다. 여유가 있는 날에도 칼을 쓰고 난 자리에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가 엎드렸다. 한참 쉬고도 칼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 베인을 보며 나는 시나브로 누적된 피로감을 한순간에 느꼈다.

"칼 쓰고 나면 치워줘~" 처음엔 가볍게, 두 번째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평생 함께 해온 습관을 바꾸기는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결국 원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 예민하게 구는 잔소리꾼이 되기 싫어 어느 순간부터는 참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만 스트레스받는 거라면 나 혼자만 참으면 된다 생각했다.


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주방에서 진과 대화하면서였다. 그 해 초여름에 합류한 진 역시 방치되기 일쑤인 칼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진은 진 나름대로 이 말을 꺼내기까지 참고 이해해보려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사실 베인을 제외한 다섯 명이 모두 칼이 불편했다면? 나는 칼이 테이블 위에만 있지 않길 바랐다. 바로 안 씻어도 괜찮으니 싱크대에만 담가 놓길 바라는데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바로 씻을 게 아니라면 싱크대에 쌓아두지 말고 쓴 자리에 두자며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칼 문제 외에도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포착되었다. 정규 멤버가 세 명이던 시절에 비해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커뮤니티 안에서는 관계, 문제, 필요 등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정말 타운홀을 미룰 수 없었다. 여러 일정 조율을 거쳐 겨우 합의에 이르게 된 어느 주말 저녁, 거실에 여섯 사람이 모였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오래 묵혀둔 것부터 꽤 최근의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중에 물론 칼도 있었다.


베인, 칼 쓰고 난 다음에 꼭 좀 치워줘.

어, 그게 왜 그렇게까지 문제야? 우리 문화권에서는 보통 그렇게 하는 걸?

어..? 여기는 그렇지 않아. 무엇보다 그걸 보는 내 마음이 너무 어지러워. 너무 보기 싫어. 스트레스받아.

아니, 칼이 있으면 너무 위험하잖아. 혹시라도 떨어지면 어떡해? 우린 개도 키우는데 혹시라도 떨어지는 칼에 맞거나 하면?

칼을 바로 씻어달라고까지는 부탁 안 할 테니까, 싱크대 안으로만 옮겨줘.

나는 싱크대에 쌓여있는 게 더 보기 싫은 것 같은데?! 어떻게 바깥에 칼 하나 정도 나와있는 게 더 안 좋은 거지?

흠...

아니, 칼이 위험할 수도 있다니까?! 안 위험해?! 그냥 좀 치워줘!

알았어, 알았어. 주의하도록 할게.


이게 일대일 대화였다면 나는 아마도 싱크대에 넣어놓는 것과 테이블 위에 방치하는 것 사이 차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유야무야 넘어갔을 것이고, 또다시 나오는 칼은 내 마음에 비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화끈한 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논의는 다행히 매듭을 지었다. 매끄럽지는 않지만 나름의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베인 칼 사건을 통해 우리가 경험할 수 있었던 타운홀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서로의 이유를 알 수 있다.
나와 진이 같은 <칼 좀 치워 파>이니 이유도 같을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정돈되고 쾌적한 환경을 바랐고 진은 그보다도 안전성을 바랐다. 진이 위험성에 대해 문제 제기했을 때 나는 이에 대해 공감하진 못했다. 공감하진 못해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이유를 안다는 것은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다면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 더 쉽게 배려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이유를 안다는 것은 한편 판단을 유보시키기도 한다. 베인이 칼을 바로바로 치우지 않았던 데에는 나름의 문화적 배경과 이유가 있었다. (다행히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게 아니란 점을 확인했으니 됐다..) 이렇게 이유를 듣지 않은 채 서로의 요구만을 이야기하는 상황이라면? 요청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단순히 무시한다고 치부하고 서로를 오해하고만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공식적인 공론장을 마련했기에 우리는 요구에만 그치지 않고, 사안에 느끼는 감정과 요구의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하고 또한 들었다. 이 논의 이후 베인이 상당히 주의했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사안이 소소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이 살면서 겪는 문제들의 많은 것들은 어찌 보면 소소한 일들이다. 에이, 뭐 이런 것 가지고. 하고 지나가고 참을 수 있다. 때로는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1의 불편함이라도 6명이 모두 겪는다면 커뮤니티가 겪는 총 불편함은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가 30회에 걸쳐 반복된다면? 이는 그렇게 소소하지 않다. 이 경우에도 모든 인원이 참석했기 때문에 단순 예민한 한 사람의 호소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사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행동에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 특정 인물의 행동 변화가 아니라 다른 해결책이 필요한 문제들도 많다. 협의나 합의가 필요하기도 하고 어떤 문제는 창의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어떤 것이든 사안이 소소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 즉슨 어떤 것을 함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분명 문제 해결로 향하는 큰 에너지가 된다.





다만 이후에도 타운홀이 문화의 중요한 축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시기, 빈도, 다루는 안건들, 진행 방식, 부대 프로그램 등을 두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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