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로를 본 일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는 미래운과는 달리 독특한 콘셉트였다. 가게 인테리어는 소박하고 평범하기 그지없었으나, 콘셉트 하나만으로 매료될 만했다. 카드는 눈앞에서 이리저리 섞이다 이내 촤르륵 떨어져 펼쳐졌다. 타로 리더는 손짓으로 카드를 고르게 했다. 보통의 리더들과는 달리 과묵한 편이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덩달아 말없이 손가락으로 카드만 골라냈다. 리더는 내가 고른 카드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나의 시선은 리더의 입에만 향해 있었다. 타로를 따로 공부한 적이 없었으니 리더가 살피는 카드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 턱이 없었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리더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의 홍연은.
2
나는 지금 당신을 바라본다. 아직은 당신에게도 그렇겠지만, 내게는 특히나 낯선 집이다. 그토록 소원하던 이사를 드디어 마쳤구나. 같이 축하를 하고 으레 그랬듯 축하주라도 들고 싶은데, 당신이 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시리도록 분명하다.
당신은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다. 화면에서는 영상이 나오고 있는데 시선은 공허하기만 하다. 영상 속 사람들은 웃고 떠드는데 당신만 비어 있다. 그 표정을 더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었다면 함께 누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당신은 나를 끌어안고 좋다, 나지막하게 말했을 테다.
하지만 때로 현실은 냉혹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곤 한다. 우리의 미래가 이런 형태일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날의 타로 리더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들었던 말이 새삼 귓가를 잡아챈다.
그때는 믿지 않았던 말을 이렇게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붉은 실로 엮이는 것이 당연한 연이었다면 조금은 더 행복한 인연이었어도 좋았잖아. 대상이 없는 원망을 소리 없이 쏟아낸다.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당신에게 시선을 돌린다. 마른안주 하나만 두고 소주를 들이켜는 당신을 바라본다. 나는 여기 있어요. 당신에게 닿지 않을 목소리를 내어보다 이내 고개를 떨어뜨린다.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어루만져 보지만 당신에겐 미세한 촉감 하나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이 생에서의 나의 업. 당신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이 생의 업을 감히 어기려 든 대가.
3
"나는 영원히 그대 옆에서 빛날 테니, 그대는 내 밤하늘이 되어줘요."
당신의 손을 꼭 잡은 채 오르던 언덕길이 있었다. 거리가 잠든 새벽, 선잠에 뒤척이다 깨어 새벽 산책을 하자고 당신을 졸랐다. 평소라면 잠에 취해 내 말을 듣지 못했을 당신이나, 그날은 유독 당신에게도 긴 새벽이었다. 함께 같은 자리에 누워 밤을 보내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신도 나만큼이나 설렜을지 모를 일이다.
어느덧 쌀쌀해진 바람을 느끼며 겉옷 하나씩을 걸쳐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꽤 늦은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산책을 할 때면 으레 걷던 언덕길을 오르며 당신의 팔에 더욱 몸을 기댔다. 당신은 웃으며 내 뺨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다, 당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 한마디를 건넸다. 그 순간 새벽하늘 위로 당신과의 영원이 수놓아졌다. 나는 기꺼이 당신을 빛나게 할 밤하늘이 될 것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영원을 꿈꾸었고 또 다짐했다. 입맞춤으로 전해진 온기에 실린 바람이 서로를 감싸는 순간이었다.
4
당신의 홍연은. 리더는 운을 떼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것 같았다. 타로 카드를 믿는 것이 아님에도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있으려니, 건조한 리더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전생에 당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입니다. 그 업 때문에 이번 생에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아요. 당신이 바라보아야만 그 업이 풀릴 연입니다. 그래야 다음 생에라도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상대방은 이번 생에도 한 번 더 희생할지 모른다는 카드가 읽혀요."
리더는 카드 한 장을 내 쪽으로 밀었다. 그저 흥미로울 줄만 알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그 전생이라는 것이 기억날 것 마냥 먹먹한 숨결이 이어졌다. 나를 거쳐 간 다른 남자와는 달리 당신은 그리도 애틋하더니 이유가 분명하던가. 당신이 거칠 또 다른 희생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러 장의 카드를 보이며 설명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언제나 내게 타로카드는 그저 재미일 뿐이었는데, 이토록 마음에 꽂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되었으리라. 당신에게 느끼는 애틋함은 사랑에 잠겨서일 것이다. 그 순간은 그렇게 생각했다.
5
영원을 말하는 그 순간은 언제나 영원이 된다. 비록 그 짧은 시간에 영원이란 말을 체감할 수는 없더라도. 당신의 입에서 흐르는 영원이란 숨결은 나를 뜨겁게 데웠다. 지금보다 주름 진 손이 되어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리란 희망. 당신의 미소에서는 늘 잔잔한 풀향을 느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에요?"
"음, 죽기 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뭔지 생각했을 때, 아마 당신과 함께 한 걸 고를 것 같아요."
고운 미소로 답해주던 당신은 지금도 같은 생각일까. 넓은 침대에 덩그러니 놓인 당신을 본다. 오늘이면 당신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날도 마지막이다. 내가 바라보야만 하는 업. 이번 생의 업이 이런 뜻일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타로를 보기 전 우리는 홍연이라 말한 일이 있었다. 그저 연이 끊기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실상 당신과 나의 붉은 실은 서로를 상처로 옥죄는 것이었다. 당신과 내 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을 바라본다. 이런 홍연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았으리라. 이번 생의 업이 다하도록 몰래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했을 테다. 당신의 삶에 나의 존재가 해가 되지 않도록.
당신은 며칠째 멍한 얼굴이다. 맡은 일은 곧잘 해나가는 듯 보이나 그 외의 개인 시간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를 못한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당신은 희생자의 위치다. 리더가 말했던 건 이걸 가리키는 것이었으리라. 의도하지 않았던 붉은 실. 이건 차라리 저주에 가깝지 않은가. 생전에 하던 그대로 당신의 입에 입술을 내린다. 하지만 서로가 느끼는 촉감은 더는 없다.
얼마간 슬픈 얼굴을 하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여기 있어요. 닿지 않을 말소리를 다시 내어 본다. 당신이 울지 않는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위로는커녕, 멍한 눈이 더욱 아프기만 하다. 당신을 향해 손을 뻗어 가만히 얼굴을 어루만진다. 붉은 실이 길게 늘어진다. 이내 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은 스르륵 풀어져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제 정말 안녕, 나의 홍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