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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Oct 10. 2021

쉽지 않았던 인정

인정(人情)이 없어서 인정도 없었다

하얗고 길쭉한 알약, 파란색의 쪼개진 알약, 분홍색 작은 알약, 캡슐 알약. 현재 내가 먹고 있는 정신과 약물들이다. 이름은 자나, 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외울 게 산더미인 세상에 약 이름까지 굳이 외우고 다니지는 않는다. 의사 선생님이 어련히 좋은 약으로 골라 처방해주셨으려고.


내가 하는 일은 제시간에 꼬박꼬박 약 챙겨 먹고 꾸준히 병원을 다니는 일이다. 효과가 놀랍도록 뿅 하고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정신과 약은 그런 마법의 묘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아질 것을 믿으며 약을 삼킨다. 하루하루, 미약하게나마 달라질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함께 넘긴다.


사실 내가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나는 한동안 나의 병을 인정하지 못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그 상황에 틱 장애까지 인정해버린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껴질 것 같았다.


언제였더라,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처음 입학해 새로 사귄 친구와 하굣길을 걷는데 증상이 나타났다. 어떤 치료도 하지 않을 때였으니 분명 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때 나를 보던 그 아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신기한 것을 본 표정, 그 이면에 숨은 '나와 다른 것을 볼 때의 옅은 혐오감'. 보이지 않는 인정(人情)에, 나는 나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외톨이가 되었다.


그때 나의 병을 인정하고 일찌감치 치료를 시작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달랐을까.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모두 쓸모없는 공상이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정신만 과거로 돌아가 봐야 괴로움만 반복하는 짓이다.


습관이라고, 단지 습관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인 지 수년. 나를 지키려 건 최면은 도리어 나를 곪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엉망진창으로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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