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크게 혼낸 날이면 어김없이 온몸이 쑤신다. 감정이 치솟는 순간, 나는 악을 쓰고 탈진할 만큼 모진 말을 쏟아낸다. 그 후 몰려오는 후회의 감정은 어김없이 내 마음을 짓누른다. 하지만 이미 터져버린 분노는 쉬이 멈추지 않는다. 옆에서 조심스럽게 나를 말리는 남편의 눈빛조차 나를 자극한다. 나는 끝내 화를 멈추지 못한다. 화라는 감정은 내 안에서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억지로 풀려하면 할수록 더 조여드는 감정들.
스스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 폭풍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춤대는 아이를 보며, 나는 문득 멈칫한다. 그 작은 아이는 날뛰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마음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평온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의 감정에 휘청이지 않고, 해답을 차근차근 알려줄 수 있는 단단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감정조절이라는 이름의 산을 넘기 위해 수많은 습관을 들였고, ‘노력하면 된다’는 말도 믿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와 남편 앞에서는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고함 한 번이면, 다 쌓아 올린 성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그 후에 찾아오는 자책은 참기 어렵고, 종종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마저 고개를 든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얼마 전, 흰 옷을 입은 아이에게 앞치마를 채워주며 식사 준비를 했다. 옷에 음식물이 묻을까 걱정되어서였다. 아이는 순순히 앞치마를 맸고, 즐겁게 밥을 먹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지에 반찬을 흘린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민감한 나는 반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웃옷 버리지 말라고 앞치마 해놨더니, 바지에 흘리니?!”
갑자기 얼어붙은 공기. 아이는 숟가락을 멈추고 눈치 보기 시작했다. “엄마, 미안해요. 실수했어요.”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 순간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아빠가 흰 바지 입은 걸 미처 못 봤네. 실수할 수도 있어. 집에 가서 아빠가 옷 빨아줄게.” 아이는 그제야 안도한 듯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 옆에서 나는 씩씩대며 억지로 밥을 넘겼다. 아직도 화가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의 옷을 손세탁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왜 남편은 괜찮은데, 나는 안 될까?
나는 아이의 실수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여러 번 말했으면, 이제는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실수 없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 그런데 그 믿음은 언제부터 내 안에 자리 잡았던 걸까?
돌아보면, 나는 어린 시절 실수가 두려운 아이였다. 도전을 망설였고, 실패할 것 같은 일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경험이 부족한 아이로 자랐다.
그 두려움의 뒤에는 언제나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있었다. 실수는 곧 질책이었고, 자책으로 이어졌다. 완벽한 인생이란 없는데도, 나는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며 나를 밀어붙였다.
이제는 엄마가 된 내가 그 감정의 유산을 이어받아 아이에게 주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실수를 나의 과거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는 그저 실수한 것뿐인데, 나는 마치 내 실패를 다시 마주한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대할 때, ‘엄마’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나로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른이다. 그리고 이젠 알아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실수는 성장을 위한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아이는 내가 도와야 할 대상이지, 나의 과거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를 통해 나는 다시 나를 배우고 있다. 때로는 괴롭지만, 이것이 진짜 성장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엄마보다 평온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 소망을, 나는 오늘도 다시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