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 학습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한글도 7살이 넘어서야 겨우 시작했을 만큼 늦된 시작이었다. 영어는 더더욱 나와 거리가 먼 세계였다. 나에게 영어는 말 그대로 에베레스트 같은 존재였다. 학창 시절 내내 성적을 위해 억지로 외워야 했던 영어는, 결국 나를 영어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고된 기억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늘 아팠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만큼은 영어를 ‘공부’가 아닌, ‘자연스러운 언어’로 접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하루 1시간, 현서네 유튜브 영어학습법’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단순히 영상만 틀어줘도 영어 학습이 가능하다는 설명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그래, 이거라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책에서 소개한 양질의 영어 영상을 아이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7살 아이는 생소한 소리에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한글 영상 앞에서는 잘도 앉아있던 아이가 영어 영상 앞에서는 몸을 베베꼬며 끝내 자리를 떠나버리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실망을 했지만, 이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고 해도 지금 당장 중국어 영상을 보라면 같은 반응을 보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러닝머신 위에서 걸으며, 아이와 함께 영상을 봤다. 아이가 자리를 비워도 영상은 끄지 않았다. 하지만 지치는 날은, 내 불안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이제 한글 영상은 없어.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돼.”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아이는 겁에 질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아이의 귀에 ‘영어가 들리기 시작하는 날’을 꼭 선물해주고 싶었다. 모국어 습득이 완성된 아이에게 ‘한글 영상 전면 차단’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이 과연 옳은 걸까. 고민이 많았지만 남편과 의논 끝에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하루 1시간, 매일 영어 영상을 보는 생활이 1년 넘게 이어졌다. 수십 번, 수백 번 거부 반응을 보이던 아이는 엄마가 함께 춤추고 노래를 불러주자, 점점 웃으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6개월쯤 지났을까, 아이는 자리에 스스로 앉아 30분, 1시간씩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영상 속 대사에 깔깔 웃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이후 유튜브, 책, 인스타그램을 뒤지며 아이의 흥미에 맞는 콘텐츠를 찾았다. 영어 그림책도 함께 읽기 주기 시작했다. 듣기에 강해진 아이는 점차 영어에 친숙해졌다.
하지만 3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본격적인 영어 수업이 시작되자 문제가 발생했다. 듣기는 가능했지만 읽고 쓰는 활동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에게 학교 영어 수업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파닉스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들으면 저절로 읽게 되겠지’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영어 수업은 듣기보다 ‘읽기’와 ‘쓰기’ 중심이었기에 아이는 점점 힘들어했다. 그제야 나는 파닉스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늦었지만 다시 교재를 꺼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자로 배우는 영어는 역시 재미가 없었는지 아이는 어려워하며 교재를 피했다. 결국 파닉스는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은 더 들어. 엄마는 이게 맞다고 생각해. 단어 시험 빵점 받아도 괜찮아.”
그 말에 아이는 다시 안심한 듯 즐겁게 영어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1년. 듣기와 그림책 위주의 영어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3학년 겨울방학, 아이가 다시 말했다.
“엄마, 영어가 제일 어려워.”
이번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아, 영어 읽는 방법을 안 배워서 그래. 이번 겨울 방학에 엄마랑 파닉스 영상 수업 한 번만 들어볼까?”
의외로 아이는 흔쾌히 수락했다. 1월부터 3월까지 20분 남짓의 파닉스 수업을 꾸준히 들었다. 따라 말하고 춤추며 수업에 참여했다. 수업 후에는 워크북으로 복습도 했다. 반복이 가장 효과적인 아이의 성향에 맞게 계속 복습하며 3개월을 보냈다. 간단한 문장을 더듬더듬 읽던 아이는 두 달 뒤부터 영어 읽기에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4월부터는 리더스북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듣기에 강한 아이를 위해 리더스북 오디오를 들려주었다. 내가 먼저 읽어주며 노출을 늘렸다. 그렇게 한 달간 30권을 반복해서 듣고 읽기를 하자, 어느새 그 책들을 스스로 읽기 시작했다. 점점 아이와 내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났다.
블랙인 프린세스를 읽겠다는 4학년 말의 목표는 아이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나는 아이가 좋아할 책을 찾기 위해 인스타 검색, 도서관 탐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엄마표 영어를 시작한 지 4년. 그동안의 답답함은 포기하지 않고 반복한 끝에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익숙한 책만 읽을 수 있지만, 이제는 안다. 한글책처럼 어떤 영어책이든 읽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한 가지를 깨달았다.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오늘의 할 일을 해내다 보면, 결국 원하는 목표는 이루어진다. 영어라는 에베레스트를 향한 여정은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 모녀는 오늘도 한 걸음씩 묵묵히 그 산을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