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아들이 잠자리에 누워 등을 긁어 달라며 잠을 청했다.
"아빠가 왜 자꾸 우리 집에 안 오지? 우리 집 좋은데."
"아빠는 후가 안 보고 싶은가보다. 왜 이렇게 집에 안 오지?"
매번 설명을 해주는 데도 너무나 오래 집에 오지 못하는 아빠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건지,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은 투정인지, 아들은 똑같은 질문을 하며 잠이 든다.
아들이 깊은 수면 상태에 안착한 숨소리를 내면 긁어주던 작은 등을 쓸어 내리며 나도 바로 눕는다.
하얗고 반듯한 천장이 자꾸 내려와 앉는다. 잘 자, 라고 나즈막히 읊조리며 그의 낡고 넓은 선상 방을 떠올린다.
그와 결혼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지인들이 어떻게 살려고 항해사와 결혼하냐고 말렸다. 수많은 편견들이 그와 나의 사이에 걸림돌이 되려 작정한듯 던져졌다. '항해사는 그렇게 바람둥이가 많대, 예전에 배에 창녀를 싣고 다녔대잖아, 종신보험도 안되는 위험한 직업이야, 배만 타니 남자가 시야가 좁을거야. 여자가 살림을 다 해야하잖아, 힘든 일 생기면 누구에게 기대. 왜 힘든 길을 가....'
걱정의 모습을 한 편견들이 내게 전해질 때 마음은 무거워졌지만 직장 앞 횡단보도에서 웃는 그를 볼 때면 내 인생에 초록불이 기분 좋게 켜졌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가볍게 머물다 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굳은 살이 가득 박힌 손바닥을 쓰다듬을 땐 마음 깊은 곳에서 그와 함께 살아갈 시간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었다. 그의 굳은 살들이 행복한 것들만 만지게 하고 싶었다. 그는 연애하는 4년 동안 외롭지 않았냐고, 5.6개월 동안 연락도 되지 않고 보고 싶지어도 볼 수 없는데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결혼하면 이런 생활의 반복인데, 일 년에 겨우 서너달만 함께 할 수 있는데 견딜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를 떠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 모든 외로움과 만날 수 있는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견디고 자기와 함께 있어달라는 애원이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나는 사랑의 모습이 한가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별을 보며, 달을 보며, 구름을 보며 당신에게 마음을 전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당신이 떨어져 극한 공간에서 열심히 일할 때, 나는 그런 당신을 생각하며 더 정갈히 일상을 꾸민다는 걸.
살결이 닿지 않고도 나의 감촉이 생각만으로 당신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꼭 옆에 있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당신이 평소에 심어주고 있다는 걸.
나와 우리 아들들은 그렇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걸.
시간적 공간적 한계성으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짧은 시간에 모두는 최선을 다하고 배려하고 있다는 걸.
담담한 그리움이 절실해지면 더 사랑이 깊어진다는 걸.
아마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러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