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괜찮음을 강요하지 마
이제 친구란 이름으로 얽매이지 않습니다.
"나는 Z가 너무 딱하다. 그렇게 걔가 짠해. 그래서 우리 모임에 들어오라고 내가 꼬시고 있어."
"난 Z가 너무 싫어. 우리 모임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어."
"나도 네 덕에 잘 됐으니까, Z도 들어와서 좀 생활이 나아졌음 하니까. 다 잘 되면 좋잖아.
"난 걔가 잘 되든 안 되든 상관없어.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정말 싫어. 난 Z가 너무 싫어."
"왜? Z는 이제 성격도 예전 같지 않고. 자해도 안 해."
"있잖아. 잘 들어. 난 Z가 궁금하지도 않고 어떻게 살든 상관없어. 하지만 내 눈에 띄는 건,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거 싫다고.
내가 Z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자해? 내가 걔 때문에 죽고 싶었어.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죽고 싶단 생각을 하게 만든 것도, 내일이 다신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던 것도 Z 때문이라고."
"그래. 어렸을 땐 그럴 수 있지. 이제 마흔이 넘었으니까 더 이해할 수 있잖아? 어렸을 땐 멋모르고 그럴 수 있으니까...."
"뭐? 어렸으니까 그럴 수 있고. 나는 마흔이 넘었으니까 그때 일을 용서하라고?
넌 내가 Z로부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니? 지금으로 말하면 왕따지. 그런데 난 그 경험을 왕따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걔가 너무 거지 같은 년이니까.
걔가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아?
Z가 자기 말 안 듣는다고, 내가 힘없는 반장이라고 얼마나 함부로 했는데. 그래서 코피 나게 공부해서 1등 하니까 Z는 우리 엄마가 촌지 주고 시험문제 빼돌려서 1등 한 거라고 소문내더라. 아무도 나한테 말 못 걸게 하고, 내가 상장받으러 나가면 박수 치지 말라고.... 아무도 나랑 밥 먹지 말라고.... 치욕이 뭔지 알아? 난 그때 이런 게 치욕이구나 알았어. 매 순간 그 수모를 견뎠어. 모두가 내가 외톨이인걸 알았다고. 그래도 아무도 모른 척했어. 아예 내 존재가 매일 부정당했어. 매일매일!
나는 내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견뎠다고. 걔가 하라는 거 다 했어. 아빠 돈 훔쳐서 걔가 돈 가지고 오라고 하면 가지고 갔어. 그런데 그 애가 불쌍하니 지금 나는 어른이니 다 잊으라고? 나는 그때 내가 더 불쌍하고 죽을힘을 다해 견뎌낸 내가 이제야 기특하게 느껴져.
내가 왜 너랑 고등학교 때부터 20대 후반까지 연락 끊은 줄 알아?
네가 Z랑 친해서야. 그게 너무 싫고, Z만 보면 화가 나고 그때 내가 겼던던 수모가 자꾸 떠올라서야. 네가 친하니까 난 그냥 비켜선 거야. 그러다 네가 그래도 그리워 다시 찾아 연락했어. 넌 내가 싫다 해도 자꾸 Z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 그 무신경함이 더럽게 싫었지만 그래도 네가 좋아서 참았어. 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Z이름만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아."
"아... 그랬구나. 하지만 그건 어렸을 때 일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그땐 어렸고, 넌 지금은 괜찮잖아?"
"너 말기를 못 알아듣는구나. 어렸을 때 일? 하! 잘 들어.
내 인생은 그 치욕에 대한 극복으로 이뤄진 거야. 그런 더러운 인성을 가진 애한테 다신 안 당하려고, 공부도 생활도 열심히 했어.
부당한 일이 있으면 난 자꾸 그때 아무 말 못 하고 겁내고, 혼자인 걸 두려워했던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여자애가 떠올라 미칠 것 같아.
왜 그때 엄마는 나를 안아주지 못했지? 자꾸 나보고 이겨내라고 했지? 왜 담임은 내가 매번 힘들다고 했는데 모른 척했지? 다 원망스러워.
나는 너무 외롭고 무서워서 책만 읽었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으니까! 책만이 내 친구였으니까! 왕따 당할 만해서 당한다는 동료 교사의 말이 얼마나 화나는 줄 알아?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 함부로 당할 사람은 없다고.
피해자는 평생 상처로 주눅 들기 일 수인데, 가해자는 미안하다는 말, 어려서 몰랐다는 말로 다 괜찮아지지. Z도 그러잖아. 그땐 어려서 그랬다고? 그럼 내가 그 사과받아주고 그래, 어렸으니까 돈 가지고 오라고 협박할 수 있지, 유언비어 퍼트려서 사람 꼴 우습게 만들고 왕따 시킬 수 있지!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야? 난 Z가 불행하라고 저주하진 않아.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데 그 애의 과거도 일조했다고 생각해.
그깟 친구도 아닌 뭣도 아닌 애들한테 질질 끌려 다녔던 바보 같고 병신 같고 정말... 외롭고... 불쌍한 13살의 내가 엄마 되고 나니까 더 선명하게 떠올라서 미치겠는데. 뭐? 지금은 괜찮잖아? 넌 어쩜 그리 잔인하니.
나한테 괜찮음을 강요하지 마. 나는 괜찮지 않아. 내 인생은 그 거지 같은 경험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니까! 나한테 괜찮음을 강요하지 말라고! 아직도 Z의 이름만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으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 A에서 Z 까지라면 걘 Z라는 순서를 붙이는 것도 아까워. 아예 빼고 싶어. 나 조금도 괜찮지 않으니까 나보고 걔 도우라고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