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KTX

우정은 삶의 상처에 최고 치료제가 된다.

by 다다리딩

"친구랑 두루두루 잘 놀아야지. 넌 어린이집에 친구 많잖아. 성민이가 다른 유치원 가지만 이게 어떻게 보면 다른 친구들과 친해질 기회가 생기는 거야. 너의 놀랄 만한 인연이 숨어 있을 수 있어!"


"어린이집에 같이 다닌다고 다 친구는 아니야. 진짜 친구는 마음을 나누는 거야. 엄만 그것도 모르고 자꾸 다 친하게 지내래."



친한 친구가 다른 유치원으로 옮기고 난 후 첫째 아들은 울적해했다. 하원 시간이 어쩌다 맞아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치면 둘은 달려가 서로 부둥켜안았다.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수다 떨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지만 일 년이 지나도 둘은 서로를 그리워했다. 첫눈이 오면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누군가 네 친구 중 누가 젤 좋냐고 물으면 안 만난 지 몇 달이 지나도 성민이라고 대답했다.


"엄마. 나는 성민이를 잘 못 만나지만, 성민이는 늘 내 가슴에 있어."


"그래. 엄마도 그런 친구가 있어."

아들은 눈이 둥그레져 나를 바라본다.


"네가 안고 자는 토끼와 원숭이 인형 사준 이모야. 향옥이 이모."



씩씩하게 시골로 내려와 친구들을 사귀는 아들을 보며 나의 어린 시절과 엄마를 떠올렸다. 낯가림이 심하고 부끄러움도 심해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마다 자꾸 배가 아팠다. 등교시키는 걸 포기하고 엄마는 출근해버릴 만큼 내 마음을 헤아려 줄 여유가 없었다. 내가 자주 아픈 이유에는 낯선 이들과 사귐에 너무나 서투르게 태어난 연약한 마음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예민한 기질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유치원 때부터 매일 아침 등원하기 싫어 울었고, 초등학교 때도 친구들 사귀는 것이 유난히 힘들었다. 학기 초만 되면 계속 배가 아팠다. 머리도 아팠고 어지러웠다. 부모님은 이런 내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계속 병원에만 데리고 다니셨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초등학교 때 친구들은 자라면서 멀어졌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색이 바랬고, 그 과정에는 아픔이 있었다. 믿었던 친구가 왜인지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등만 보일 때, 나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못하고 풀이 죽었다. 누구도 친구 사귀는 법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아, 나는 늘 서투르고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 책을 읽었다. 그런 나를 가련히 여겨주고 등하교를 같이 해준 것은 늘 인기 많은 여동생이었다.


그리고, 향옥이.




향옥이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국민학교 2학년' 때, 향옥이가 아파서 향옥이 엄마가 수업시간에 데리러 왔을 때였다. 향옥이가 '볼가리'에 걸려서 얼굴이 붓고 열이 난다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부은 얼굴로 엄마와 집에 가는 향옥이가 너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6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을 때 생일이 하루 차이나서 생일순으로 학번을 나눴기에 나와 그녀는 나란히 38번, 39번이 되었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학번은 아마도 음악시간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노래를 잘하는 그녀와 나란히 음악실기 시험을 보는 것은 곤욕이었다. 노래도 못하고 목소리도 작은데, 고개를 푹 숙이고 '꽃섬 나루 나루터에'를 부르면서 오히려 나의 이상한 목소리가 그녀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묻히는 것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맘속에 각인되었다.


그녀는 아주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우리의 손바닥보다 큰 나뭇잎으로 부채질하며 더운 공기를 몰아냈었다. 그리고 '플란다스의 개'를 알려주었었는데,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이 재미없었다. 그냥 그녀의 노래를 듣고만 있고 싶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더 큰 학교에 적응해 나갔고 어울려 다니는 무리도 생겼지만 마음은 여전히 늘 불안했었다. 그리고 친구 사귐에도 서툴렀다. 지금껏 남아 있는 친구들을 보면 늘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친구만 남았다. 어쨌거나 옥이와 나는 다른 중학교로 갔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학원 앞으로 나를 만나러 온 옥이가 편지를 주었었다.


무덤덤하게 편지를 가방에 넣고 학원 수업 때문에 아쉽게 그녀를 배웅했지만 그날의 선선한 저녁 무렵의 공기와 향옥이의 눈웃음과 자전거까지 기억에 날 정도로 너무 좋았던 날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며 지친 날, 그녀는 너무나 당연한 선물처럼, 정기구독받는 책처럼 내 삶에 위로를 주러 만나러 오곤 했었다.


내가 임용고시 치기 전 그녀가 보낸 응원의 선물을 받고 너무 좋았으나 결국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내가 인도 여행의 후유증으로 장티푸스 패혈증에 걸려 장기 입원했을 때, 결혼했을 때, 신혼집에 혼자 있을 때, 아이를 낳고 부산에 똑 떨어져 친구 없이 지낼 때.


그녀는 정말이지

불편한 삶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선물로 정기 구독한 하나의 진솔한 책과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 인간관계에 서툴러 기본적인 것도 못 해주고 친구란 이름만 유지했었다.


100여 년 만의 홍수로 상주시가 잠겨 그녀가 임시보호 시설에 기거했을 때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셨을 때, 엄마 아빠랑 갔었던 것처럼 조의만 표하고 왔었다.


직장 생활을 하고, 나만의 생각과 감정에서 좀 빠져나와 타인의 삶을 볼 여유가 생겼을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은 이것이었다.


홍수가 났을 때, 수소문해서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할 걸. 수해 피해 난 집을 정리할 때 무작정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미약하긴하지만 일손을 보탤 걸.


그녀의 아버지를 보내는 길에 그녀 옆에서 밤을 지새우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같이 나눠줄 걸. 난 그때 아무것도 급할 것이 없는 대학생이었는데.


그래서, 나에게 '휴직'이라는 여유가 생겼을 때 그녀를 만나러 무작정 가고 싶었다. 아이들을 유치원 보내고 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나가 기차를 타고 그녀를 만나 맛있는 것을 먹고 그냥 빈둥빈둥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나보다 20년 늦게 알게 된 상처에 대해 어설픈 위로라도 하고 싶었다. 그 전의 내가 받았던 것들처럼. 한 조각의 상실을 나누고 뱉고 복기하고 나면 더 깊은 상실을 맛볼지라도 지나고 보니 그렇게 아낌없이 마음을 털고 나면 또 괜찮아지는 것이 삶이었듯이. 아직도 만남과 이별에 어설프고 서툴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내가 그녀의 삶 한 부분을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우리는 평일의 낮에 대전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치앙마이에 가고 싶다는 내 소원을 들어주려 치앙마이풍의 한 태국 식당으로 데려가 주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란도란.

그녀와의 시간을 복기했을 때 난 항상 '도란도란'이라는 단어를 떠오를 것이다.


내가 아팠던 인간관계의 한 조각의 기억을 던졌을 때, 그녀는 정확히 그 시절을 기억했다. 건조하고 아팠던 6학년의 시절. 왕따라는 것을, 학교 폭력의 유형이라는 것을 나는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 그 아이가 정말 내 인생의 시발년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시발년'이 카드를 팔아 돈 만들어오라고 해서 더 큰 형태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고분고분 어설픈 실력으로 그림을 그린 카드를 수줍게 팔고 다녔을 때 선뜻 사준 것이 그녀라는 것이 마침내 기억났다.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며 살았지만, 그 6학년의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던 것은 그 시간에 향옥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력의 기억이 괜찮아지기까지, 단 한 번도 그녀는 먼저 그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같이 '참 나쁜 년'이었다고 말해주는 그녀를 보며 나는 조용히 웃었다.


신은 그 시절 나에게 아무런 선의를 베풀지 않으셨다. 그저 무심한 방관자와 같았 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에게 최초의 친구를 선물로 주신 셈이다.


나 스스로 그녀가 내 소중한 인연임을 알 때까지 그 어떤 신호나 언질을 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그 지난한 시간을 보내거나 견디면서 마흔이 넘어 또 다른 의미를 존재에게 부여하는 법을 깨닫도록 했다. 그렇게 나는 '친구'의 참 의미를 그녀를 통해 처음 깨달았던 듯하다.


'참으로 진실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