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둘 점심을 먹이고, 궂은비에 바깥놀이도 막히게 되자 아이들은 슬그머니 텔레비전에서 만화를 보여달라고 한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평일은 미디어 노출을 할 시간도 없이 아이들은 시골길 구석구석을 매일 누빈다. 시골의 밤은 너무나 빨리 찾아오고, 시골 아이는 텔레비전 켜달라는 떼를 쓰기 전에 노곤해져 잠 자기 바쁘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만화 스토리에 홀딱 빠진 아이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슬쩍 나왔다.
괜히 미안해서, '남편 택배에 보낼 화장품'을 사러 나갈 겸 나갔다 오겠다고 묻지도 않는 핑계를 덧붙여 보낸다. 아직도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굉장히 죄스럽다.
그래도 나는 용기 내 그렇게 하기로 한다.읽을 책과 무선자판기를 넣은 가방을 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무엇을 할까 가슴은 벅차올랐다.
집에서 2.8킬로 떨어진 제법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지방의 한 대학교의 주말은 한가로운데 딱 2개밖에 없는 카페는 이미 만석이다. 그다지 좋지 않은 자리, 카페의 정중앙의 원탁 테이블에 앉아 커피가 나올 때까지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궂은 봄비가 멈춘 일요일의 햇살은 인자했다. 고개를 떨구던 벚꽃들은 햇살을 받아 더 풍성하고 빛나게 꽃잎을 펼쳤다.
벚꽃이 흐트러졌던 대학교 교정, 소개팅하는 무리들의 설렘, 벚꽃 아래 수많은 커플들의 들뜬 데이트. 늘 단짝을 찾고 싶었지만 어긋났던 인연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면 가슴 한편이 애잔하게 들떴다. 어디선가 드라마 공식처럼 인연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내게 다가올 것만 같은 기대감이 따랐다.
그 벚꽃 같은 청춘이 찬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벚꽃이 찬란하게 흐드러질수록 나는 자주 비루함을 느꼈었다. 고민도 생각도 많았으나 선뜻 자신이 없어 어떤 삶에 대한 기대는 곧잘 공상만으로 끝맺기 일쑤였는데 훗날 돌이켜보니 그 시절 나는 마음속에 '에이, 내가 할 수 있겠어? 나 같은 애에게...'
이런 자기 불신이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늘 돈이 없었고, 공부나 취업은 더 자신이 없었다. 돈이 없으니 나를 위해 옷을 사거나 좋은 샵을 가서 머리를 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었고, 연애를 해도 커피값 앞에서 늘 주늑 들곤 했다.
20대의 나에게..
벚꽃 색을 닮은 배스킨라빈스의 '체리 쥬블레'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아주 우울했던 날은 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아껴 아껴 입안에 녹여 먹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달콤함이 마치 나의 인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20여 분간의 짧은 대리만족과 망상이 끝나면 내 앞에는 허무함 한 조각뿐이었다. 해야 할 공부와 과제가 쌓아있었지만 왜인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너무나 오래된 성공의 경험이 설화처럼 여겨졌다.
나는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변변찮은 성적으로 취업할 수 있을까.
나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자꾸만 용기를 끌어올려야 겨우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 시절의 나는 자주 용기가 사라지거나 의지가 약해졌었다. 연애든, 취업이든. 삶을 멋지게 꾸려나갈 방법을 몰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주 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 캠퍼스를 가볍게 뛰고 싶었다. 너무 힘들게는 싫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만 할 뿐 결국 뛰지 못했었다. 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는 것 같아서.
벚꽃이 흐드러진 꽃길을 보며 아이를 키울 때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뛰고 싶어. 많이 걷고 싶어. 걷고 걸어서 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맑아지고 싶어.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어. 뛰고 싶어.'
그러나 아이를 키우기 고단했던 나는 그때도 뛰지 못했었다. 뛰는 것보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 하는 것이 더 먼저인 것 같아서.
어느 정도 아이를 키우고, 내 집을 빚 없이 두 채 마련하고 나니 눈 앞에 또 벚꽃이 피어 있었다.
2021년의 벚꽃은 그리 찬란하지 않았다.
덤덤한 봄의 색이었다.
그리고 마흔두 살이 된 나는 이제 안다.
이 꽃잎이 지고 무성한 잎이 달리고 곧 단풍이 드는데 벚꽃 나무는 꽃보다 단풍색이 더 이쁘다는 걸. 꽃송이도 이쁘지만 겨울의 강하디 강한 짙은 나뭇가지도 참 운치 있다는 것을.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타인이 열광하고 찬미하는 순간에만 있지 않음을.
커피를 받아와 글을 쓰며 창밖의 벚꽃을 틈틈이 본다. 내 주위에 내 나이 절반 정도의 학생들이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괜스레 가슴이 뛴다.
그때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그냥 뛰면 되는 건데.
스무 살 무렵의 고단하고 늘 외로웠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뛰어.
그냥 뛰어.
하고 싶으면 행동으로 옮겨
너무 많은 두려움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던 너는 결국 차근차근 하나씩 해내게 돼. 그러니까 너무 너를 믿지 못하지 말고 뛰어."
그래.
그 시절의 나를 만날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니까 차라리 지금 두 번째 스무 살을 내가 살자. 아이 키우느라, 돈 버느라 핑계는 접어두고 뛰자.
두 번째 스무 살의 나는 즐겁게 운동하고 공부하며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첫 번째 스무 살의 내가 많은 노력으로 경제적 여유와 정서적 성숙을 지금 나에게 선사했으니.
글을 쓰고 나면 나는 부모님께 조금 더 육아를 미루고 벚꽃나무가 즐비한 캠퍼스를 뛰다 갈 것이다. 내 몸에 붙은 게으름과 나쁜 습관의 덩어리를 털어버리려고, 내 머리에 가득 찬 생각뿐인 덩어리를 털어버리고 더 가벼워지려고.